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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bokchi님의 서재
  • 몰락하는 자 (무선)
  • 토마스 베른하르트
  • 9,000원 (10%500)
  • 2011-08-29
  • : 2,668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글렌굴드는 쉰한살에 자연사했다. 하지만 소설속 글렌굴드의 친구인 베르트하이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르트하이머와 소설속의 ‘나’, 그리고 글렌굴드는 오래된 친구사이였다. 셋은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 스승인 호로비츠의 지도하게 글렌굴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할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성장을 포기해야 했다. 셋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반항한다는 의미로 피아니스트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한명은 성공했지만 둘은 실패했다. ‘나’는 진로를 바꾸어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글렌굴드를 질투하며 평생을 등지고 살게된다.

글렌굴드가 베르트하이머에게 붙여준 ‘몰락하는 자’ 라는 별명. 별명인지 멸칭인지 베르트하이머는 서서히 별명대로 몰락하기 시작했지. 재즈는 스윙이지만 오스트리아는 클래식의 세계이다. 베르트하이머 에게는 예술과 완벽성은 중요했고 그가 살던 도시는 특히나 그러했다. 그는 시골의 낙천적이고 유쾌한삶을 살지 못했다. 글렌굴드는 사람이 싫어서 시골에서 작업했다면, 그는 건강이 안좋아져 사람을 등지며 시골에서 살게되었다. 둘은 친구사이였지만 한명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지.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자기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해도 죽을때까지 천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의 자서전 일것이다. 결국엔 그가 잡아두었던 여동생마저 결혼을 하고 그는 ‘몰락하는 자’가 되고 말았지. 글렌굴드는 평생을 천재로 살며 쉰한살에 자연사 했다. 하지만 그것을 소식으로 들은 베르트하이머는 좌절감과 열등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베르트하이머가 좀더 열린생각으로 사회를 살았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살던 도시는 예술과 철학이 풍부했지만 낙천적이지 못했다. 그는 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했다. 하지만 그가 배운건 천재와 비교되는 비참함 그자체 였다. 그리고 사람과 시골의 천박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가 살던 예술의 도시는 베르트하이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생각한다. 글렌굴드는 북미인 특유의 낙천적 사고관을 지니며 살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환경이 달랐다. 그가 살던 환경과 정신적 인간이라는 점이 ‘몰락하는 자‘로 삶을 이끈건 아니었을까? 그는 스스로 ’몰락하는 자‘로 달려가고 있는걸수도 있겠다. 어쩌면 p139의 ”우리의 몰락하는 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몰락하는 자였어, 처음부터 몰락하는 자였다구” 이말이 사실이 아닐까 싶다.


해설서에는 ‘예술의 절대성과 완벽성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상’ 이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이소설은 그것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들면 ‘운명이란 존재한다면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람이다’. 이런 의미도 말하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술성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도시라는 사회의 위험성도 말해주고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160p의 소설책 이었다. 이소설의 가장큰 특징은 독백형식 이라는 것이다. ‘나’의 심리 변화를 통해 베르트하이머를 말해주기 때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었다. 마치 스윙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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