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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tnwls님의 서재
  • 모든 요일의 여행
  • 김민철
  • 12,150원 (10%670)
  • 2016-07-25
  • : 6,620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 글이 된다면 문장을 쓰는, 문장을 아주 잘 쓰는 카피라이터는 좋은 문단을 쓸 것이고 좋은 문단은 서로 어울려 좋은 글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100m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42.195km를 뛰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민철 씨의 책은 100m 단거리 달리기도 42.195km의 마라톤 경기도 아닌 산책이었다. 빨리 가기도 천천히 가기도 하는, 빨리 가도 천천히 가도 상관없는. 그냥 그가 걸었던 걸음의 속도를 내가 걸었던 걸음의 속도에 비추어보며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걸어 나갔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고, 좋은 사람이 읽는 책은 좋은 책일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읽은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에 나온 책들을 적어두었다. 이 책들을 다 읽고 나면 나도 이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결국 나는 이 책들을 다 읽지도 못할 거고 그중 몇 권을 읽는다 해도 여전히 똑같은 나일 것이 분명하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좋은 사람이 읽은 좋은 책인데. 책을 읽는 그 순간 나도 좋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적당한 자기방어적 체념을 가지고 그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로맹 가리 <여자의 빛 >
조르주 페렉 <사물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윌리엄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빌 버포드 <앗 뜨거워 heat>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김소연 <시옷의 세계>
존 버거 <A가 X에게>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밀란 쿤데라 < 불멸>
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what‘s your favorite? 이다음에 내가 내 동네가 아닌 어느 곳에 여행자로 가게 된다면 하루에 한 번은 꼭 저 물음을 던져야겠다. what‘s your favote?이라니. 저 질문 하나로 이 책은 최고의 여행 실용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여행자에게 줄 혜택 보다 예측 불가능한 저 질문 하나가 여행자에게 최고의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여행 가기 전에 네이버에서, 한국인들한테 너는 뭐가 제일 좋냐고 물어볼 것이 아니라 일상을 떠나 도착한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너가 제일 좋아하는 걸 나한테 좀 말해달라고. 

내 모든 요일의 여행과 내 모든 요일의 독서와 내 모든 요일의 일상을 기록해야겠다.

밑줄, 생각
11쪽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27쪽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28쪽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37쪽
트램이 섰다.
문이 열렸다.
정거장도 아닌데.

아무도 내리지 않고
아무도 차지 않는다.
그저 동네 아줌마들과
차장의 수다만
타고,
내린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42쪽
<사물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조르주 페렉의 이 소설에는 사물에 대한 열망에 인생을 저당 잡힌 남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들에게는 ‘파리 전체가 영원한 유혹‘이었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소유의 기호들을 계속 늘‘리는 것이었다. 사물들에 대해 비슷한 취향을 가졌으며,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사물들을 사랑했다.

44쪽
나는 행복해야 했다. 파리에 왔으니까.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안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행복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나는 행복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었다. 

48쪽
지도와 정보를 내려놓자. 우리의 취향과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속도를 찾자. 

우연한 행복을 찾아보자. 진짜 여행을 시작해보자.

57쪽
매일을 살아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도 고향은 없다는 것을.

76쪽
잠깐 사랑했다가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한 도시를 오해하며 바라보는 짝사랑도 꽤 괜찮지 않은가?

80쪽
평일만 있는 일상이 잔인한 것처럼, 열심히 여행하는 순간만이 가득한 여행도 잔인한 것이었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했다.

: 맞다. 여행도 주말이 필요하다. 5일 정도 여행했으면 토요일엔 느지막이 일어나 게으른 점심을 먹고 굼뜨게 준비를 한 뒤늦은 오후의 잠깐을 돌아보고 얼른 숙소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토요일이 필요하다. 숙소 주변의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숙소가 위치하는 동네의 현지인 인양 어슬렁거리는 일요일이 필요하고 씻지 않고 숙소에서 예능이나 드라마만 보고 있는 휴일이 필요하다. 6일에 하루, 5일에 이틀 정도는.  

97쪽
이동하는 건 여행자만이 아니라는 걸

106쪽
what‘s your favorite?

125쪽
이곳은 다시 없다.
사람이 변하고 빛이 변하고 풍경이 변하고
무엇보다
내가 변한다.

고대 소피스트가 이미 진리를 설파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여행에 있어서는 나도 소피스트가 된다.
같은 도시에 두 번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지금을 남김없이 살아버리는 것.
다시 없을 지금, 여기.
다시 없을 내가 있다.

130쪽
어차피 이곳에 있으면서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138쪽
타인의 취향은 안전하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과 구글을 몇 개월간 넘나들며
핸드폰 지도앱에 수백 개의 별표를 쳤다.
맛있다는 추천에, 예쁘다는 추천에, 싸다는 추천에
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추천에 별은 끝없이 번식했고
어느새 은하수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만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동방박사도 아니면서
별을 따라 목적지에서 목적지로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여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안전한 곳만 찾아다니다 보니
모험의 즐거움을 놓쳐버린 것이다.
나는 결코 안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은하수가 아니었다.
나만의 견고한 별 하나였다.

159쪽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욕심이 있다.
그저 카를 무럭무럭 키우는 욕심이 내겐 있다.

164쪽
예감은 정확했다.

179쪽
˝우리가 영어를 썼으면 어쩔 뻔했어. 도대체 비밀 이야기가 없었을 거 아니야. 프랑스어도, 이탈리아어도 어쨌거나 알파벳 언어는 안전하지가 않아.˝ 여행지에서 한국어는 비밀스러운 암호가 되었다. 

194쪽
하지만 나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피 나는 뒤꿈치가 아니라 나의 문장이다. 지금 이 글은 그 아침의 아름다움 근처에도 가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의 언어는 이토록 빈약하기에 결국 사진을 내밀어본다. 피가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이 사진들 역시 그 아름다움의 근처에도 가닿지 못하고 있지만.

207쪽
유명하다니까, 꼭 가야 한다니까, 뭐가 있을 것 같으니까, 바쁜 여행 중에 시간을 쪼개서 도착하는 곳들은 늘 우리에게 등 돌리는 기분이다.

213쪽
누가 크게 CD를 틀어놓은 줄 알았다. 온 집이 울리도록 크게. 그 소리가 골목까지 흘러나온 건 줄 알았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사람들이 들어갈 때마다 수줍어했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실수를 연발했다. 저토록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연주가라니. 그런데 저토록 부끄러움이 많다니. 우리는 한참이나 머무르다 돌아섰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녀 연주 앞에 멈춰 선 후, 그녀의 연주가 꼬이고 있었다. 명백히 우리가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버스 안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 버스 안. 그녀가 먼저 우리를 아는 체했고,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칭찬을 했다. 그녀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알고 보니 독일 시골에서 왔단다. 독일과 프랑스는 서울과 부산처럼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는 너무 시골에 살아서 여기까지 오는 데 열여섯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 줄 모른다며 그녀는 꽤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처음 유럽여행을 떠난 한국 대학생처럼. ˝실은 오늘 처음으로 용기를 낸 거예요. 독일에서 이 무거운 기타를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요. 일부러 가장 작은 도시, 가장 외진 길에 자리를 잡고 겨우 몇 곡 불렀는데 그때 저를 보신 거예요. 어느 순간 눈치를 챘죠. 제 동영상까지 찍고 있다는 걸요. 그 순간 너무 긴장이 되어서 계속해서 실수를 했고요. 음악은 좋은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자신이 없어요.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그녀에게 우리가 말했다. 진심을 다해서 말했다. 방금 전 녹음한 너의 노래를 우리는 벌써 몇 번이나 들었다고. 커피를 마실 때도 들었고, 맥주를 마시면서도 들었다고.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냐고. 우리는 CD를 틀어놓은 건 줄 알고, CD 소리를 따라서 갔는데 네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그게 이 작은 도시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절대로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정말로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 이야기에 빨갛게 상기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놀랐다. 정말로 자기가 가진 보석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십 대의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던 표정. 작은 칭찬에도 놀라고, 세상 그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장 모자란 표정. 내게 그런 재능이 있을 리가 없다는 표정. 보석을 가득 안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표정. 그런 표정을 그녀가 짓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칭찬을 들어보는 아이처럼. 그녀는 이미 충분했는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 

216쪽
그 모든 젊은엔 박수가 필요하니까.
그 모든 용기엔 팬이 필요하니까.

224쪽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 하나하나에 아저씨는 계속 설명을 덧입히고 있었다. 

233쪽
나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희망을 고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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