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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느님의 서재
  • 경애의 마음
  • 김금희
  • 14,400원 (10%800)
  • 2018-06-15
  • : 9,725

처음 <경애의 마음> 발췌문에 반해 창비출판사에 사전서평단 신청을 했고, 선정이 되어 안내문을 받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경애의 마음」은 한가지 독법으로 해석할 수 없을 만큼 다층적으로 읽히는 수작입니다.」 이걸 읽었을 때 이 작품이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다 읽고 난 지금 돌이켜보자면, <경애의 마음>은 가공된 원석처럼 수많은 결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독자마다 그중에서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 각자 다른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전서평단의 인원이 300명이나 되었던 것도 납득이 간다. 300명이면 <경애의 마음>과의 300번의 만남이 있을 것이고 그들 각자에게 파고든 이야기는 전부 다를테니. 나는 내가 <경애의 마음>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경애는 다시는 자신을 방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고통 속에 떠내려가도록 놓아두지 않겠다.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마치 환영처럼 아주 단순한 일도 차마 하지 못해 무기력하던 어느 여름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언니의 응원을 받아 겨우 문밖으로 나가 옥수수나 맥주를 사들고 왔던 시절. 생각해보면 경애가 파업 이후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그때 경애를 드러내놓고 싫어하던 과장은 회사에서 설 선물이 나와 나누어줄 때도 경애의 책상은 건너뛰곤 했다. 파업을 함께했던 노조 쪽에서도 경애를 냉랭하게 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와해되다시피 한 노조가 다시 결성되었지만 경애의 가입은 불허했다. 경애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 역시 그런 위계가 작동하는 세계라면 관심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경애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시흥의 창고에서 생각했던 것이었다.」



  <경애의 마음>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공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다루는 태도다. 그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방기'다. 나를 고통 속에 떠내려가도록 두는 것, 삶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좀먹도록 두는 것, 쾌락을 가장한 학대로 그 시간을 견디는 것, 진정한 나 자신을 숨기고 다른 존재로서 활동하는 것. 경애는 인생에서 맞닥뜨린 여러 번의 고통에 일관되게 자기 자신을 방기함으로써 대처해왔다. 화재 사건에서 홀로 살아남았을 때도, 파업 후 회사에 복귀했을 때에도, 사랑했던 연인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뒤에도. 그러나 친구였던 E와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스북 페이지 양쪽으로 이미 얽혀있던 상수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경애를 만난 상수도 변한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또 한 번의 고통과 직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모멸 속에 내버려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동적인 적극성을 통한 구원.

  결국 구원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지만, 그 스스로에 의한 구원의 계기가 타인의 마음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 켜켜이 쌓여 서로의 기억에 내려앉은 그 마음, 곧 경애(敬愛)의 마음. 그것이 우리가 고통 속에 자신을 방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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