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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나락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 17,820원 (10%↓
990) - 2021-01-15
: 1,764
1.
“언제 사람은 철학적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라고 김상봉 교수는 그의 저서 《나르시스의 꿈》에서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패러디해본다. “언제 아이는 어른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환멸이라는 감정을 알게 될 때이다.”
2.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유명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패러디해본다. “개츠비가 왜 위대한 지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지.”
3.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집 《행복의 나락》 (조이스박 Joyce Park옮김, 녹색광선, 2021)을 재밌게 읽었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자면 꽤 긴 분량이 필요하겠지만,
역자의 말에 있는 이 간명한 구절이 핵심을 찌르는 분석이 아닐까.
그 구절은 바로 ‘환멸을 겪으면서도 환상을 끝까지 놓지 않는 능력’(p.216)
스무 살 무렵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서른 무렵이 되어서야 가슴 저미게 보였던,
개츠비가 바라보던 강 건너 편의 ‘녹색 불빛’(green light) 같은 환상 말이다.
4.
어른에게 환멸은 더 이상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30년 세월 동안 여신인 줄 알았던 꿈의 여자가 알고 보니 ‘쌍년’임을 알게 될 때(<오, 붉은 머리 마녀>),
‘행복(이라는 건 언제든지 순식간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온몸으로 알게 될 때,
내가 품은 환상이라는 게 사실은 깨지기 일보 직전인 유리구슬이거나 파도 한 번에 허물어질 오해로 쌓은 모래성임을 깨달을 때,
환멸은 들이닥친다.
인간에 대한 환멸, 세상에 대한 환멸, 종국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5.
환상이 유리구슬 혹은 모래성이라면 환멸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흔히 환멸을 낭떠러지, 구렁텅이, 수렁으로 비유하지만 나는 환멸이 일종의 장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환멸은 언제든 찢을 수 있으며 결국 찢어야 한다.
그것을 찢고 나면 보다 근원적인 생의 아이러니한 신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끔찍하지만 동시에 나를 일으키는 숭고한 고통, 자신과 타인에 대한 떨칠 수 없는 연민, 인생에서 좋은 것은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겸허한 깨달음 같은 것.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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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에게 삶은 너무 빨리 왔다가 가버렸다. 남은 것은 쓰라림이 아니라 연민이었다. 남은 것은 환멸이 아니라 오직 고통이었다. 악수를 하며 서로의 눈에 깃든 친절함을 확인할 때에 이미 달빛은 충분히 밝았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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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가 이 단편선집을 읽고 나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스콧 피츠제럴드가 얼마나 문장을 섬세하게 구사했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환상이든 환멸이든 어쩜 이토록 유머와 여유를 갖고 묘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번역을 거치게 되면 섬세한 심리 묘사나 유머러스한 뉘앙스는 희생을 당하기 쉬운데,
이 부분을 온전히 잘 담아낸 것은 옮긴이의 역량일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빵빵 터졌는데, 막 웃고 나서, ‘혹시 이거 나만 웃긴 건가?’ 싶어 뒤늦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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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남자가 동네에 나타나면 모두가 버림을 받았고, 데이트는 죄다 자동적으로 취소되었다.
이 상황을 어찌해보려 해도 주디가 알아서 하는 일이라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주디는 운동 법칙처럼 ‘이겨서 쟁취’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주디에게는 똑똑함도 먹히지 않았고, 매력도 먹히지 않았다. 이 중 어떤 쪽이라도 강력하게 주디에게 들이대면, 주디는 즉시 이 문제를 육체적인 매력으로 해결해버렸다. 그녀의 육체적인 황홀함이라는 마법 아래에서 강한 남자든 명석한 자든 모든 이가 자신의 게임이 아니라 주디의 게임을 해야 했다. 주디는 자신의 욕구가 기쁨을 가져다주거나 자신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때에만 즐거워했다. 아마도 너무 많은 젊은 사랑과 너무 많은 젊은 연인들을 거치면서 자신을 지키다 보니 내면에서부터 전적으로 자신만 키우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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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읽는데 다음 생에는 주디의 얼굴과 몸으로 태어나서 주디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불끈 솟았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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