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의 첫 아트 미스터리 소설 <제로의 늦여름>. 다양한 색채의 아름다운 청춘,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 냈던 그가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실화를 소재로 마치 도시전설 같은 수수께끼에 적절한 로맨스 요소를 섞어 스릴 넘치면서도 어쩐지 청량한 느낌의 작품이 탄생했다. 찾아보니 표지 역시 사실화를 사용해 디자인했다고…… 정말 놀랐다.
'나유타'라는 가명을 쓰며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실화 화가가 있다. 주로 인물화를 그리며 결과물은 흡사 사진을 방불케 한다.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사진 기술이 발달한 요즘, 사실화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는 여러모로 퇴색되고 있지만 나유타의 그림은 무언가 다르다. 그런 그에게 언젠가부터 사신이라는 별명이 뒤따른다. 나유타가 그린 인물은 무조건 죽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야기는 한때 재능 넘치는 화가를 꿈꿨던 카논이 나유타의 그림에 매혹되고 그를 취재하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흐름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기도 하며 딱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나유타에 대한 알쏭달쏭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는 순식간에 휙휙 넘어가 버리고 만다.
영상화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개성이 그저 고스란히 담긴 것인지 문장 속에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색채가 듬뿍 담겨 신선했다. '죽음'이라는 불행한 키워드가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장의 매혹적인 그림이 만들어 낸 각 인물들의 교차점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얽혀, 부드럽게 정리되는 마무리는 정말 좋았다.
화가의 마음 속 어둠과 예술 작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이란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까?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 '나유타'와, 아무 수도 없는 0을 뜻하는 '제로'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예술, 사랑, 인연과 재능, 신뢰와 배신 그리고 생명과 죽음, 다양한 요소를 조화롭게 담은 완성도 높은 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