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언제나 낯설다. 그러나 동시에 친숙하다. 그가 내놓은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텍스트는 독서 방향성을 잃게 만든다. 이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덜컥 겁나기 마련이다. 텍스트일 뿐인데, 네모난 책에 들어찬 하얀 바탕 위에 새겨진 검은 글자일 뿐인데도 그것들이 모여 나를 일격 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두려움이 생겨난다. 다만 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견줄 부정적인 감정과 전혀 다른 생생한 감각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앞서 말한 내가 느끼는 낯선 동시에 친숙한 감각은 리스펙토르에게 얻어맞은 뒤 해방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글 쓰고 싶었다. 비선형적 시간을 믿고 뒤엉킨 사고 회로가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상태임을 증명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세계는 체계화되어 있었다. 견고한 문법의 틀 안에서 벗어난 글은 비문이 되어 삭제되기 일쑤였다. 정답과 오답,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은 글쓰기를 부정당하는 것은 곧 자아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정갈한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나는 누구이며 내 말법은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리스펙토르는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나타났다.
내 경험과 비슷하게 『리스펙토르의 시간』 저자 엘렌 식수는 언어 해방 즉, 여성적 글쓰기를 향한 갈증이 심해지던 때에 리스펙토르의 글과 만났다. 『리스펙토르의 시간』 은 계속해서 확장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공간을 찬미하는 텍스트이다. 리스펙토르 헌정글처럼 보이기도 하나, 리스펙토르의 글을 통해 삶의 순환을 깨달은 경험이 깃든 텍스트이기도 하다.
여성적 글쓰기는 실천이자 수행이다. 식수는 이를 체계적으로 여성을 억압해 온 서구 사회를 탈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수행으로 본다. 우리는 무의식조차 억압된 채 살아간다. 그 때문에 여성적 글쓰기와 마주했을 때 드는 당혹감과 ‘난해하다’라는 평은 기존 체계가 작동하여 빚어낸 불편함이다. 우리는 보통 불편한 대상과 마주치면 그를 경계선 너머로 보낸 다음 ‘타자’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타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확고부동한 정신을 깨뜨릴 도끼로서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를 제안한다. 맞다고 여겨온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 때, 거기서부터 우리의 정신은 물결친다.
여성적 글쓰기는 타자를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를 향해 나아가기에 문법과 시간 등 기존 체계로부터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무한한 미끄러짐 그러니까 실패에 가까운 글쓰기가 이어지는 까닭은 타자를 해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글쓰기란 재현할 수 없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행위이다. 이를 위해서는 낯섦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버팔로를 ‘버팔로’라 부르는 순간부터 그것은 ‘버팔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돼버린다. 식수는 총 세 개의 장을 통해 리스펙토르가 행한 타자-되기의 방식을 분석하며 글쓰기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낯섦을 받아들인 자가 되어 글쓰기를 실천하기. 그것이 식수가 리스펙토르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이다.
❝ 타자는 곁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에도 가장 낯선 존재로 남아야 한다. ❞
❝ 클라리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인간 주체를 바퀴벌레와 평등하게—긍정적인 의미로—드러내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종에 따라. ❞
❝“안 될 게 뭔가?” 이것이 클라리시가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다. (…) 우리는 가능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누구든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안 될 게 뭔가?”가 살아 있는 괄호를 닫아 버리지만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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