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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안티고네 > 김교신의 역사의식 [20030511]




 

 

 

 

 

 

 

 

김교신의 역사의식   [20030511]

  재작년, 그러니까 2001년 이맘때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으로 떠들썩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무교회가 본래 떠들썩한 행사와는 거리가 있어서 다들 그 해가 100주년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때맞춰 『김교신전집』이 복간 되었고, 또 ‘100’이란 숫자가 갖는 상징성 덕분에 언론에서도 김교신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2001년이야말로 김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주목을 받았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김교신과 윤치호

 

 

 

 

김교신은 살아생전 단 한번도 남들 앞에 내세울만한 지위나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45년 생애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27살부터 45살까지, 19년이었는데, 그 중 27살에서 42살까지의 16년간을 중등학교 평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9년 공생애의 대부분을 평교사로 있었던 셈입니다. 교장은커녕 교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생애를 살았고, 죽는 날까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렇다할 관심을 모은 적도 없었습니다. 월간잡지 『성서조선』을 간행했지만 독자는 300을 채 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윤치호(1865-1945)와 아주 대조적입니다. 윤치호는 김교신보다 나이가 36살이나 연상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김교신과 같은 해인 1945년 12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근대사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윤치호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는 이미 19세기말에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온,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습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지냈고, 한국 YMCA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시대 조선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 중 하나였습니다.

윤치호는 1930년에는 기독교 조선 감리회의 탄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조선 기독교계의 거물이었습니다. 평신도였지만 교계에서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까지 지냈습니다. 연희전문은 당시 기독교 교육기관 중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김교신이 흥남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린 조선인 노동자들을 간호하다 감염되어 사망한 4월, 바로 그 달에 윤치호는 일본 귀족원의 칙선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 친일파의 대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해 12월에 뇌일혈로 사망합니다.)

요컨대 윤치호는 좋은 집안 배경과 뛰어난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평생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영향력을 한껏 누리며, 1930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 최고의 원로로서 행세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계, 정계, 종교계에서 명실 공히 거물급 인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워 당시 조선 땅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1883년부터 해방 직전인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날마다 영어로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윤치호일기』라는 제목으로 11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1973-1989년). 얼마 전에는 그 일부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습니다(역사비평사).

윤치호에 비하면 김교신의 생애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교신은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의 양정고보, 제일고보(현 경기고), 개성의 송도고보 등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간행했습니다. 그는 한 집안이 가장이자 교직에 종사하는 평신도로서, 19년 공생애(27-45세)의 대부분을 적자투성이 월간 잡지 발행에 바쳤던 것입니다.

잡지를 자전거에 싣고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면 등 너머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서점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도 않는 잡지’ 등등의 비웃음을 사야만 했습니다.

교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은 경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김교신전집』을 보면 김교신이 YMCA에서 집회를 가지려다가 무교회주의자란 이유로 거절당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윤치호는 바로 그 무렵 서울 YMCA 회장과 YMCA 연합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 윤치호는 김교신 같은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의 심판

흔히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은 다음에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자들은 평가 시점을 그보다는 조금 늦춰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대략 한 세대, 그러니까 30년 정도 흘러야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비밀 외교문서를 30년 정도가 지나면 일반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김교신은 윤치호와 같은 해인 1945년에 작고했습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60년이 다 되어갑니다. 두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충분히 가능해진 시점입니다. 역사적 평가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에 대한 평가의 윤곽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당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학식과 지위와 명성을 누렸던 한 사람은 오늘날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개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던 또 한 사람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김교신전집』 뒤표지에는 ‘백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 김교신’이라고 큼직한 활자로 씌어 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분의 신앙과 애국을 기리는 모임까지 마련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김교신과 관련된 한 가지 소식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전국 초중등학교에 재직하는 크리스천 교사들이 만든 ‘기독교사연합’이란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좋은 교사』라는 월간잡지도 펴내고 있습니다. 이 잡지 2001년 10월호에는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좇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김교신의 신앙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김교신전집』이 막 복간되기 시작한 무렵이라서, 이 기사를 통해 많은 교사들에게 김교신과 『김교신전집』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사연합이 금년부터 해마다 모범이 되는 교사들을 뽑아서 상을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의 이름을 ‘김교신 상’으로 정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당장 금년에 그 첫 번째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상의 제정은 무교회 측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입니다. 기독교사연합으로부터 이런 행사를 하겠노라는 사실을 통보 받았을 뿐입니다. 전적으로 그분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입니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윤치호를 추모하는 모임이 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해평(海平, 지금의 경북 선산) 윤씨 가문이 해방 후 윤보선 대통령 같은 인물도 배출한, 이른바 명문 집안이니까, 가족 차원에서는 추모 행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적인 추모 행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윤치호와 김교신, 이 두 사람의 경우처럼 생전의 평가와 사후의 평가가 이렇듯 극적으로 엇갈리는 사례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전통시대의 유교적 역사관은 춘추필법에 의한 시시비비 정신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역사는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그르다고 분명하게 가려주는 윤리서의 역할까지 했고, 그리하여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선비들은 ‘역사의 신’ 또는 ‘역사의 심판’을 믿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듯이, 유교에서는 역사의 평가,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저는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유교의 이런 측면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흡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아직 모르던 시절에도 우리 선조들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성삼문, 박팽년 같은 사육신이 나오고, 이순신 같은 충신이 끊임없이 나온 것은 다 이런 데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비록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게 받은 ‘자연법’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시적 안목

김교신의 제자인 노평구 선생은 연세가 높아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만, 선생께서는 평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하나님 안에서 민족과 사회와 역사를 거시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김교신이야말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을 잃지 않았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근시안적으로만 본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극복이 불가능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미당 서정주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식민지배가 영원하리라고 판단하고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지식인 사회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윤치호 역시 그런 경우였다고 생각합니다.

윤치호의 세계관은 ‘약육강식’의 세계관이었습니다. ‘힘이 정의’라는 강자 중심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의 사고는 제국주의를 정당화 하는 논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목표였지, 그 현실을 이상적인 현실로 바꾸려는 보다 차원 높은 목표와 의지는 없었습니다. 민족의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윤치호의 좌우명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였다고 합니다. 약소민족이면 약소민족답게 강대국 앞에 고분고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입니다. 그의 좌우명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처세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강자에게 붙어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 월간지인 『성서조선』을 거의 혼자 힘으로 158호까지 간행했습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민족애를 쏟아 부었습니다. 극심한 일제의 검열 가운데 폐간의 위협에 직면하기도 수십 차례였으나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앙 동지들의 격려에 힘입어 대략 15년이란 기간에 걸쳐 잡지를 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억압 하에 1942년 3월호(158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조와’(弔蛙)가 발단이 되어 세칭 ‘성서조선사건’으로 잡지는 폐간되고 전국적으로 몰수되었고, 주필인 김교신을 비롯한 국내외의 독자들이 검거되었습니다. 당시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의 이들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 파뜩 뛰어 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100년 후에라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그런데 당시 같이 감옥에 갇혔던 제자 류달영(柳達永)에게 김교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김교신이 공생애를 일관하여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김교신전집』 전편을 통해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교신은 일생, 교사시절은 물론, 후일 흥남 공장에 근무할 때까지도 늘 서재에는 대형 한국지도를 걸어놓고 생활했다 합니다. 김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김교신이 늘 지도를 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김교신은 일제의 침략에 유린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자칫 맹목적인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란 논문을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습니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합니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한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엑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식민지 조선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비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상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윤치호를 비롯한 그 시대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념을 뛰어넘는 우정

1933년 9월 초순 『일기』에는 김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는 친구 한림(韓林)을 형무소로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한림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한림이 김교신의 신앙동지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림은 무슨 기독교 관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른바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사건의 주모자로서 6년여의 복역을 마친 후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일기』에 보면, 김교신은 감옥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자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김교신의 눈에는 공산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태도와 그 당시 조선 기독교인들의 초라한 모습이 크게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30년대는 흔히 한국기독교사의 암흑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입니다. 일제의 압박에 신앙적 지조를 꺾고 힘없이 굴복했습니다.

필경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록의 거수(巨樹)에 비한다면 오늘 기독신자의 거개는 고층건축의 옥상 분재’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교신은 그 후로도 한림과 여러 차례 만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8년 9월 15일자 『일기』에도 ‘한림 군과 정담(情談)의 기회를 얻은 것이 기쁨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가 폐간의 위기에 몰려 근심에 빠져있던 1940년 6월 19일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을 받아, 용기를 내라고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쾌담수각(快談數刻). 형은 본래 ML당 사건의 거두요 지금도 물론 유물론자이지마는, 여(余)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준순(浚巡)할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그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신도가 안 한다면 자기가 후사(後事)를 돌보아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한림은 후일 김교신이 흥남에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병사했을 때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을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보통이 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과 ‘골수 공산주의자’ 사이의 우정, 이것은 냉전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담장 안과 밖을 철저히 분리하여 생각하는 한국 기독교인들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김교신은 『일기』에서 ‘사상으로나 행동으로나 중성적(中性的) 인물에게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유물주의자라도 반드시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선 범사에 철저하고야 볼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1935. 1. 18). 이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 소위 반(反)종교인들과는 비록 근본적인 상위로 인하여 쌍방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서로 일맥이 통한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1934. 12 16).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란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기독교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분들은 결국엔 ‘교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신앙 이야기를 하다 보면 궁극에는 ‘교리’ 이야기로 귀착합니다. 마치 형상기억합금과도 같다고 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이 ‘교회’와 ‘교리’로 화제를 돌리고 마는 그분들의 귀소 본능은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김교신의 이념을 초월한 태도는 근본주의에 휩쓸리다시피 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에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로마서 10:10). 그런데 제 주변을 관찰해보면, 오늘날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일종의 율법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 이것 자체가 하나의 율법적 행위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의 실천을 자랑거리로 삼고, 종교적 오만과 독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토머스 칼라일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칼라일은 과연 우리가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얼마만큼이나 관철시키고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칼라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고백이나 주장이 진정한 종교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임을 입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나 주장은 종교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칼라일은, 종교란 사람이 가장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칼라일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가 진정으로 믿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 자신에게도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이런 유행가 가사도 있습니다만, 사실 사람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믿는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많은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기 인식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평구 선생은 평소 ‘인간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알려 하느냐?’고 호통을 치곤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 없는 신앙이 내포하는 위험성을 경계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문사철(文史哲)을 인문학의 세 기둥이라고 합니다만, 인문학의 목적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인간 인식’에 있습니다. 문사철 세 분야는 각기 가는 길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지엽말단으로 흘러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본래 목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가 일종의 율법적 행위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확인할 길이 없고,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기인데, 과연 입으로 시인한다고 다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리고 한 입으로 이 말 저 말 지껄이는 우리의 입만 갖고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닌 한 그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나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의 삶의 열매가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말씀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어떠합니까?

여기에서 월간 『기독교사상』 서진한 주간의 글을 잠깐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2003년 3월호). 서진한 주간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는 오래 전부터 기독교인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고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예수쟁이라고 하면 다들 싫어하면서도 그 신실성은 믿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금융거래에서도 목사, 장로, 교인이라고 하면, 절차를 더 까다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사회적인 신뢰, 도덕적인 신뢰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 주위를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을 부를 때 ‘놈’자를 붙여 부르곤 했습니다만, 요즘은 기독교 목사들에게도 그런 칭호를 붙이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됩니다.

열매 없이 겉으로만 기독교인임을 표방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간주할 근거는 매우 약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인용을 했습니다만, 김교신 선생은 공산주의자 한림을 만난 후 ‘기독교를 믿는다 하여도 다수의 기독교도와는 도무지 언어와 사상이 상통할 수 없는데 반하여, 소위 반(反)종교인들과는 비록 근본적인 상위로 인하여 쌍방의 완전한 일치에 이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서로 일맥이 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만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건전한 상식을 지닌 반(反)종교인이 예수와의 정신적 거리가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늬만 기독교인 사람보다는 한림 같은 공산주의자가 하나님에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의 허위의식

이제 김교신 선생과 한림의 우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시사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가 일종의 율법처럼 변질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의 실천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율법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척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태도가 타당한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사람을 미워하면 살인한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심의율(心意律)이라고 합니다. 육체를 움직여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뿐이지 마음으로는 이미 상대를 살해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자신과 같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라는 율법을 실천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태도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경우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중세 카톨릭 종교재판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종교적 입장이 다른 사람을 공권력과 물리력으로 잡아들여 마녀로 선고하고, 영혼을 정화한다는 미명 아래 화형에 처했던 저 악랄한 중세 종교재판관의 모습입니다. 이교도에게서 성지를 탈환한다는 미명 아래 일곱 차례나 원정길에 올랐던 십자군도 종교재판관의 모습과 오십보백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십자군이란 용어 자체가 제정신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사에 다 나오는 이야기지만 십자군은 사실 종교를 빙자한 조직적인 살인, 약탈, 방화 집단이었습니다. 예수의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행동입니다. 기독교를 빙자한 조직폭력 집단이었습니다.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기독교를 들먹이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마음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남의 마음, 그것도 마음의 중심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겉보기에 공산주의자이지만 실은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히 자처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더욱 기뻐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제 속도 모르는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을 참칭하는 오만과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때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멋대로 남의 신앙을 판단하는 사람은 ‘신앙인의 허위의식’에 빠져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才), 학(學), 식(識)

앞에서 김교신과 윤치호에 대한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윤치호를 들먹거리는 이유는 그의 친일 행적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친일파 하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양심과 지조를 버리고 민족을 배신한 인물들이라고 매도하지만, 그와 같이 윤리적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악질적인 친일파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양심을 버리고 의도적으로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윤치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으로는 애국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주관적’으로는 애국자였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나라를 저버리고 민족을 배신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자발적인 친일을 하긴 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신은 일평생 옳은 길을 걷는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릇된 인생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공적으로는 잘못된 생애였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평가, 역사의 심판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 옆에서 역사를 기록하던 사관(史官)이 있었습니다. 사관에게는 세 가지 자질이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재(才), 학(學), 식(識)이 그것입니다. ‘재’란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학’이란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자질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친 것은 ‘식’이었다고 합니다. ‘식’이란 분별력,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방향감각, 역사의식을 말합니다.

‘식’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215년에 공포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즉 대헌장입니다. 마그나 카르타는 권리청원, 권리장전과 더불어 영국 헌정사의 3대 문서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문서입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존의 폭정에 맞서 귀족들이 항의한 결과 얻어낸 성과물입니다. 그런데 이 문서를 보면 당시 참여한 귀족들 대부분이 자기 이름 옆에 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귀족들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몰랐기 때문에 도장으로 대신한 것입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글도 읽고 쓸 줄 몰랐던 문맹자들이 영국 정치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무식하긴 했지만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방향감각과 역사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재와 학의 필요성을 부정하자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식’이 없는 ‘재’와 ‘학’이 사상누각이란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재’와 ‘학’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윤치호와 김교신을 견주어 봅니다. 물론 김교신도 일본의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수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윤치호가 ‘재’와 ‘학’의 면에서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애의 열매를 두고 좀더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윤치호는 ‘재’와 ‘학’에서는 우수했을지 모르나, 김교신의 ‘식’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김교신이 옳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윤치호는 당대에 뛰어난 지식과 재능, 지위와 명성을 누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결국 ‘기능적 지식인’에 머물렀습니다. 수단으로서의 지식은 풍부했지만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해방 후 식자들이 널리 개탄했던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원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계, 재계, 학계에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공부도 많이 하고 지식도 많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의식은 없습니다. ‘재’와 ‘학’은 있으되, ‘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난 3월 9일에 있었던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국민들이 다 알고 느끼는 문제를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만할 정도로 엘리트임을 자부하던 그 집단이 자신들의 한계를 온 국민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실제로 그 자리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윤치호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분별력, 판단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위기는 축복

 

 

 

 

정신과 전문의 중에 정혜신이란 분이 있습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입니다. 제가 읽어보니 글 솜씨도 수준급입니다. 그분이 쓴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 40대를 거치면서 신체적, 사회적 한계를 느끼면서 자신에게 절망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몸은 늙어가고, 직장인들의 경우는 해직 등의 위기를 겪으면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혜신 의사는 이런 중년의 위기가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겸손해 지면서 인간적으로, 내면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경험을 통해 오히려 높여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8복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방금 중년의 위기가 축복이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정혜신 의사는 여기에 예외가 되는 집단이 있는데, 그 집단이 바로 정치인들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제나 따뜻한 양지를 찾아다니는 해바라기 정치인들은 결코 위기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경험하지 못했으니 내면적으로 성숙해지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몇몇 정치인들을 볼 때, 얼굴이 마치 ‘마귀’처럼 생겼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링컨은 사람이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이 그들의 천박한 내면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스바냐는 이들을 ‘찌끼 위에 가라앉은 자들’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 일단 술이 다 익으면 포도 찌꺼기를 걸러내고 맑은 술은 따로 보관해야 합니다. 그래야 술맛이 오래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귀찮다고 찌끼를 걷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통 안에 담아둔 술 전체가 탁해져서 못쓰게 된다고 합니다.

‘찌끼 위에 가라앉은 자들’은 위기를 겪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안주한 채 시간을 영원인 양 생각합니다. 닫힌 시각 속에서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자신을 객관화 하여 볼 줄 모릅니다. 그 우물은 지위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 우물은 돈일 수도 기득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우물은 교회일 수도 있고 교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물 바닥에 앉아 거기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 지위, 감투, 권력, 돈에 안주하려는 속성은 있습니다. 이런 속성은 모든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윤치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해봐야 백년도 못되는 짧은 인생을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속성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위와 권력의 확대재생산에만 골몰하는 모습입니다.


영원의 역사의식

앞서 노평구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우물 밖의 넓은 하늘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시간 차원의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한정된 인생을 전부로 알고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사회적 차원의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자신의 직업과 지위와 금력에 안주하여 광대무변한 하나님의 우주를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김교신은 이런 의미에서 실로 우물을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살다 간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교신은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원의 역사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김교신의 일기를 보면 우주의 무한대성과 시간의 영원성에 대한 경탄을 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김교신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날짜로 계산하곤 했는데, 이것도 같은 문맥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교신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미약함을 통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그 미약함을 들어 김교신으로 하여금 전 시간과 전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역사의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낮아짐으로써 더욱 멀리, 더욱 높이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국 김교신은 두 가지 면에서 다 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사 앞에서도 옳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그 일에 대한 증인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김교신의 길이 옳았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2003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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