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최태현님의 서재
  • 눈 이야기
  • 조르주 바타유
  • 11,700원 (10%650)
  • 2017-03-30
  • : 1,255

  (작성중)


  "인간의 성적 욕망이란, 만약 누군가에게 의해 왜곡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고 즐거운 기능이지만, 음란함은 관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2. 그(작가)의 후기

  3. 수잔 손택의 포르노그래피 문학에 대한 비평

  4. 소설가 김태용의 해제

 

 그리고 위의 인용문은 비평(3)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수잔 손택은 앞의 인용문을 "사회가 자연에 부과한 소설"이라면서 비판한다. 터부taboo가 있기 때문에 음란해진다는 건 오히려 섹슈얼리티라는 자연스러움에 사회가 부여한 허구라는 것이다. 손택이 지적한 음란함에 대한 범주의 오류 논지를 이어나가자면, '관습'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는 순간 그들의 주장은 무너진다. 사회적 관습이라는 건 결국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대적일 뿐더러 종교에 있어서도 성행위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성행위의 범주는 외계인이 도착한 한 분화구에서 모든 문명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이비적 범주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분야에 걸쳐 서로 교집합을 이루고 때로는 서로의 집합에 비껴 바깥에 머물기도 하는 다공성이다. 상대적 범주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음란함이 하나의 잣대로 규명되어지는, 모든 곳에서 동질적이고 불가분적인 일자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므로 음란함은 모든 곳,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데도 없다. 음란함은 관습 안에서 있고 관습을 넘어서서 있으며 관습이 없는 곳에도 있다. 음란함은 만연해 있는 것이므로 이로써 성행위와 같이 자연스러운 지위를 얻게 된다.

  (물론 만연해 있고,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 행위가 당위성을 얻는 건 아니다. 이 논의에서는 불가피하게 윤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유보한다.) 

 

  물론 절대주의자에게는 위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논지는 모든 문화를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문명'이나 신의 절대적 '교리'가 아닌 동질적인 '문화'로 바라볼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의 관점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절대주의자는 교화와 포교 활동을 통해 이른바 미개한 자들을 계몽시켜려고 한다. 만약 그들의 문명과 포교가 절대적으로 당연하거나 옳은 것이라면, 상대방을 교화시킬 필요가 없다. '절대적'이라면 상대방은 그들의 신념이나 문명을 아무런 저항 없이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몽을 당하는 그들이 저항하거나 반격을 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 그들의 절대는 무너지고 만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음란함에 대한 인정을 들 수 있겠다. 그들은 역설적으로. 성적 욕망을 끊임 없이 경계하는 데에서 그들이 성에 대한 욕망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해 절대적으로 부분이라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 경계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충동적이고 단순하게 나체를 전시하는 포르노그래피가 있다. 다른 하나는 관습에 대한 경계심을 주시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포르노그래피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전시에 불과하다면, 관습을 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눈 이야기>는 앞의 두 가지 것과는 다른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를 하기 위해서 이야기가 생성되고 그 이야기로 인해서 다시 전시가 일어난다. 관습을 물리치고 조롱하고 침뱉고 그 위로 사정한다. 하지만 그런 음란한 행위는 관습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음란함 그 자체를 뿜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체가 전시 되는 긴 회랑 속에서, 따라붙는 큐레이터가 실시간으로 전시되고 있는 고유한 나체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여주는 것 뿐이다.  


  음란淫亂의 음은, 장마의 '음'이기도 하다. 장마철이 되면 습도가 올라가며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런 반면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몸이 떠오른다. 그 뜨거움에는 일련의 상상이 뒤따른다. 밖에서 잔뜩 비를 맞고 온 상대방 몸 위로 달라붙은 옷은 신체의 윤곽을 드러낸다. 비를 맞은 그의 몸은 미열을 띄고, 그 온기를 담아낸 입김을 내뱉는다. 그리고 주로 실내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장마를 누군가는 도래하는 생명의 단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가뭄을 해결해주며 바닥을 보이던 저수조가 다시 채워지게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는 음란을 '생명의 탄생'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일삼는 견지과 같다. 사실 장마에게는 어떤 목적성도 없다. 단지 장마이기 때문에 산사태가 발생하게도 하고 홍수가 일어나게도 한다. 또한 비가 몰아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굳이 '안 에서' 머물 이유도 없다. <눈 이야기>에서 그 사례는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 어둠이 내림녀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내는 엄청난 소리는 긴 천둥소리에 벌써부터 압도당했고, 번갯불이 번적일 때마다 두 처녀가 입을 다문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대낮처럼 환하ㅔ 드러났다. 어떤 난폭한 열광이 우리 세 사사람의 육체를 부추기고 있었다. 두 개의 젊은 입술이 내 엉덩이와 불알, 음경을 다투었고, 어떤 괴물의 포옹에서 벗어나려는 듯 침과 정액으로 축축해진 여자의 두 다리를 나는 계속해서 벌리고 있었다. 괴물이란 내 움직임의 극도의 난폭함 같은 것이었다. 결국에는 따뜻한 빗물이 억수처럼 쏟아지더니 완전하게 발가벗고 있는 세 사람의 몸뚱이를 따라 철철 흘러내렸다. (...) 

----------------

  손택은 성적 행위와 음란함을 같은 선상에 위치시킨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기독교의 억압과는 별개로 매우 의심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인류의 일반적 경험보다는 극단적인 것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금기와 욕망은 갑자기 타인에게 아무 이유 없는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에서부터, 죽음이라는 의식의 소멸에 대한 관능적 갈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