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마음으로 읽었어요
루미너스 2020/06/11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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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 김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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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20-05-15
: 71
그 어떤 절실한 감정도 지나고 보면 절대적인 적이 없었음이 분명하지만, 그때는 밑도 끝도 없이 더 근원적인 회의에 맞닥뜨렸다고 생각했다. P12
✍︎표제작을 포함한 열 편의 소설로 구성된 책은 각 편마다 신비한 느낌들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납득은 되는 이야기들의 전개. 어렵고 난해한 느낌이지만 묘하게 빠져드는 이야기들의 매력.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문장을 힘들이지 않고 종이 위로 툭툭 던져냈는지 궁금하다가도 이내 그냥 책에 몰두하게 된다. 어느 정도 독서량이 쌓인 지금의 나를 놓고 보았을 때, 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그가 어떠한 문체를 주로 사용하며 어떤 책들을 써왔는지 원치 않아도 머릿속에 먼저 그려지곤 한다. 신간을 읽을 때 재단하는 나쁜 습관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소설이었다. 전혀 (어쩜 나만) 알지 못하는 작가의 소설이라니 진부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독특해도 너무 독특한 서술 방식과 주제였다.특히 종이 아이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이러다가 내가 포슬린 아이를 낳는 거 아닐까? 란 걱정을 조금 해보았다. 소설이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흙 이야기를 하면 흙이 그대로 느껴지는 착각이 들고 지하실의
눅눅한 향도 봄에 부는 바람의 질감도 전해진다. 차가운 얼음조각 같은 말들이 천천히 녹아내리듯 소설 내용도 스며든다.
익숙한 곳을 방문하는 자만이 갖게 되는 자연스러움이거나 자신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자의 여유로움이었다. P13
개인적 취향이라는 말은 착각이다. 시선의 취향일 뿐 p19
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은 고양이보다 더 나른하게 숲에 내려앉았고, 그는 어느 때 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P21
어디 집뿐일까. 사는 것도 다르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숟가락을 뜨고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것 모두 중력에 저항하거나 타협하는 일이지. 사는 게버겁다면 그건 곧 중력에 저항할 힘이 없다는 뜻이야. 말하자면 중력은 인간의, 아니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지. 힘이 들면 사람은 주저앉거나누울 수밖에 없어. 중력과 타협할 힘조차 남아 있지 못하면 더이상 살아갈 수 없는 것이지. P23
종이를 사서 특별히 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종이 공예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종이를 사서 펼쳐놓거나 벽에 붙여놓고 냄새를 맡거나 쓰다듬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황홀한 빈 여백으로 삐져들었다. P108
숲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잠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굵은 나무들 사이에 빼곡히 메우고 있는 잔가지들이 방향에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언제나 전진을 막는 장애물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사소하고 무시해도 좋을 자잘한 것들이었다. P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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