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또한 영화 같은 면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면 그냥 저절로 영화를 보게 된다. 물론 어떤 감독은 아주 철저하게 능동적인 관람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영화와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술술 읽힌다. 그것 또한 글발이라고 하고, 공모전에서 수상이라도 하려면 그런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클레어 키건의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나가기 시작하면, 멈춰 세운다. 카프카가 문장 자체에서 부조리함을 드러내어 표면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면, 클레어 키건은 쓰여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상상하도록 한다. 이것은 미학일까?
<맡겨진 소녀>를 읽었을 땐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었을 땐 무언가 서늘함이 느껴졌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보지 않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푸른 들판을 걷다>의 첫 번째 단편 <작별 인사>에서 분명하게 일어난 ‘성폭력’을 묘사하지 않는 것은 미학이 아니고, 또 그렇다고 작가의 확고한 철학으로 꽁꽁 싸맨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는 ‘폭력’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안 보이는, 아니, 분명 그곳에 있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들추려고 하지 않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클레어 키건의 글을 읽는데 좋은 지침서가 된다. 맨 처음의 이야기 <남극>은 여성의 욕망을 따라가게 되면 그 욕망은 안전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걸 이야기한다. 누구나 갖기 쉬운 욕망이지만, 마치 그런 욕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듯,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욕망을 품은 여성은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읽을 수도 있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투박함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20대의 클레어 키건이 분노하고, 실험하고, 질문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키 큰 풀숲의 사랑>은 잊을 수 없는 엔딩을 선사한다. 배경을 보면 21세기의 사랑은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불륜이 만들어내는 묘한 관계성을 암시하는데, 그건 어쩌면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미 우리가 본 장편들과 비교하면 미성숙하고, 군더더기가 있는 문장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투박함과 더해져서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20대의 도발적인 질문과 마주할 수 있다.
작품별로 리뷰를 남길까 했지만, 그보다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끝마치는 것이 앞으로 이 글을 읽을 분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대문을 누가 여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맡겨진 소녀>의 영화를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항상 키건이 묘사하는 곳은 차고에서 시작하여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문을 지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차를 타고 얼마 못가 차가 멈추고, 대문을 연 뒤, 차가 통과한 후 다시 차에 올라야 한다. 여기서 대문을 여는 사람은 항상 운전자인 남성이 아니라 조수석에 타고 있는 여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가장 먼저, 대문을 누가 여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즉, 문제 자체의 사소함이다. 크나큰 사회 문제들이 널리고 널렸다. 대문 따위 누가 여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누군가 이 질문을 들고 와서 토론하기 시작한다면, 그 토론은 시시하고 하찮은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그러하다. 이 하찮은 질문을 하나 던지는 순간, 둘 중 하나다. 엑셀 결혼, 반반 결혼까지 별의별 사연들이 넘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쫌팽이들의 불바다가 되거나, 누군가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백수 나부랭이의 하소연으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겐 사무친 한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 또한 무시당하기 쉬울 것이다. 그때 이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마주하고, 한탄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할 것이며, 또 어떤 작품에서는 심심한 위로를 얻을 것이다. 어떤 영화감독이 말했다. 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는 매체라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말로 하면 부서질 수 있는 감정들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꼭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