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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  Hyung Chul님의 서재
  • 어떤 패배의 기록
  • 김항
  • 18,000원 (10%1,000)
  • 2025-02-14
  • : 1,235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던 것부터 고백해야겠다.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이한 전개에 속으로 큰일났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과연 내가 서평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의외로 어렵게 느껴지던 몇 페이지를 지나자 술술 읽혔고, 무엇보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나갔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비평으로 읽을 수 있지만 첫 챕터인 비평의 비평이나, 여러 의견들을 비평하는 것은 2차 문헌과도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으로 책을 읽어나갔던 인상을 살펴보면,

 

1. 잘 알지 못했던 일본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재미. 그러니까 1930년대의 이토 이야기라던가, 일본의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더더욱 흥미로웠다.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군국주의자 일본, 징병, 위안부 문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휩쓸려가는 상황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1930년대의 일본의 공산당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2. 걸출한 일본의 비평가들을 2차 비평하는 것 또한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탁월한 식견 뿐만 아니라 이 내용이 현재 일본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제로까지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3.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후 민주주의의 실태를 바라보며 작금의 대한민국을 반추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아니, 안전은커녕 사실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히려 제국주의의 탐욕을 버리지 않은 일본보다도 지금 우리는 더 큰 질병에서 허덕이고 있다. 많은 것들이 중첩되어 보이고, 연결고리에 묶여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옛사람은 가만히 풍경을 보며 꿈꾸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의연한 산하가 싫증나 마음속 풍경을 마음대로 바꿔 그리고 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 바뀐 풍경이 눈앞에 있다. 우리도 옛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풍경을 보기는 본다. 옛사람보다 아마 더 가만히 앉아 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앉아 있는 의자가 1초에 100미터의 속도로 움직인다. 창밖의 풍경은 현실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꿈꾸는 것과 동일한 심리 상태가 아니면 어떻게 이 이상한 모습으로 변한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묘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자동차에 타야 한다. 꿈에서 깰 순간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덕분에 우리는 자기 힘으로 꿈을 창조하는 행복도 용기도 인내도 잃어버렸다."

 

이것이 고바야시가 본 근대적 삶의 근본 조건이다. 현실을 꿈꾸듯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불안은 객관적 정세 변화에 따라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근원 조건이라는 것이다. 고바야시는 도사카의 비판에 답하면서 정세에 좌지우지되는 불안에 맞서 현대적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불안을 대립시킨다. 따라서 고바야시가 말하는 건전한 상식이란 도사카가 호들갑스럽게 조장하는 정세 불안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안을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꿈같은 현실을 감내하는 정신의 태도다. (p.34-35)

 

그런데 근대 일본 작가들에게 북방으로의 여행은 단순한 이국체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으로 성립한 근대 일본의 발자취를 몸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으며, 이국이지만 이국이 아닌, 동시에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기묘한 회색지대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근대 일본이 상실한 전근대적 생활상을 발견하고는 노스탤지어에 젖었고, 어떤 이는 이주 일본인의 강인한 생활력에 감탄하며 조국의 저력을 확인했으며, 어떤 이는 자만에 빠진 일본인이 현지인에게 자행하는 차별과 멸시를 부끄러워했다. (p.37)

 

소년들의 표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힘차게 보이는가 하면 축 처져 보이기도 했다. 가라앉아 보이는가 하면 쾌활하게도 보였다. 처음 그 느낌이 뭔지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머지않아 분명히 이해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소년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난해함이 없었던 것이다. 보는 내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뿐이다. 그들의 얼굴은 그저 어린아이의 얼굴에 불과했다. 진정 어려운 경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얼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어른처럼 곤란에 대처하는 의지가 없다. 그 대신 곤란을 곤란으로 느끼지 않는 젊은 에너지가 있다. 희망 속에 사는 재능을 가지지 않는 대신 절망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도 없다. 그 천진난만함을 소년들의 얼굴에서 분명히 읽었을 때 나는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들의 반항도 복종도 천진난만한 것이었으리라. 그와 달리 지도자들은 소년들을 지도하기는커녕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닌다. 결핍도 하나의 훈련이라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이론이나 정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실제와 생활을 보려는 고바야시의 눈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결핍이나 곤란을 슬로건으로 이겨내려는 어른의 낭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이 훈련생들의 생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는 여기서도 자신의 비평 원리를 관통시키고 있다. 여타의 만주 기행과 달리 고바야시의 기행은 역사의 분기점을 확인하고 미래의 일본상을 투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일본의 상황을 만들고 이해해온 논리적 지적 도덕적 전제들을 효력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만주를 기록한다. 그것은 고바야시에게 1930년대 후반의 폭주하는 비상 상황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p.42-43)

 

이 책의 묘미 중 하나인데, 저자는 고바야시의 이론들을 하나하나 비평한다. 고바야시의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대입하면서 읽어나가며 나만의 독해를 하게 되는 과정을 겪은 뒤, 저자의 결론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론이란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위대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비평하는 이들의 또 다른 이론이 나오는 것이니. 여하간 그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한 이면을 엿본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결국 우리(혹은 나만..)는 일제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느냐 옹호하지 않느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세계관은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자명한 것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한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의미를 붙잡아 현실을 해석하기에 의미를 제거하고 원래 인식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인식이란 이미 언제나 의미를 통과한 것이기에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도약 혹은 ’용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 에세이를 “연합적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는 연합적군 사건 속에서 ’의미라는 질병‘의 극한 사례를 봤다. 그들에게 세계는 이념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곁에 있는 존재마저도 고유한 시간을 함께한 동료라기보다는 이념을 통해 평가하고 단죄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가라타니는 여기서 현실의 혼돈, 즉 동료를 포함한 인간과 변혁 대상인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복잡함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박적인 의미의 질병을 본 셈이다. (p.60-61)

 

위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흐름은 전세계적으로 흘러가는 이상함이 존재한다. 지금 새롭게 급부상한 극우들과 극단주의의 세력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다. 20세기부터 지구 내부의 국가들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평화에 대한 범죄‘라는 법규범은 일본과 독일이 일으킨 전쟁을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범죄행위로 다뤘다. 그 범죄가 처벌되는 법규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었다. 그런 한에서 이 범죄는 키케로 시대부터 서양의 법사상에 익숙한 해적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키케로가 해적이란 어떤 권리도 의무도 없다고 했듯, 또 카를 슈미트가 인류에게 적은 없고 적을 철저하게 비인간으로 취급한다고 말했듯 인류의 평화를 침해한 범죄자는 인류 보편의 법정에서 단죄받는 해적이자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인간 집단을 비인간으로서 규탄하고 비인간인 한에서 섬멸할 수 있다는 궁극의 전쟁을 내포한다.

이렇게 인류를 전제로 한 보편주의는 적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비인간으로서 추방하는 근원적인 ’섬멸전쟁‘으로 성립한다. 그런 한에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고 후자를 섬멸/추방하는 전쟁을 국가 안전보장으로 내새우는 것이다. 따라서 신안보법제는 보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내리던 ’섬멸전쟁‘을 체현하고 실현한다. 이런 사정에 비춰보면 전후 헌법과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는 보편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섬멸전쟁‘에 무지했다. (p.104)

 

박유하에 따르면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피해 사례의 역사적 다양성을 모두 민족의 딸에 대한 모욕이란 서사로 환원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향한 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의 노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 맥락에서 박유하는 “전후민주주의”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 자율적인 한 개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관료나 일반 국민의 “선량”한 마음을 무시했다고 규탄한다. 그것은 전후 ’대다수‘의 일본 국민을 일부 과격한 우익과 동일시하는 일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전후 일본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원리주의적 비판을 휘두르는 “도덕의 경직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유하의 접근은 전후 일본에 대한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다. 물론 이때 전후 일본이란 국민 대다수를 자율적으로 자립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개인으로서 길러내는 전후민주주의를 요체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소/고발 이후 역사학적인 실증이나 정치적 논쟁 수준에서 여러 논점이 제기되었지만, 박유하가 스스로의 입장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인식론적 전제가 여기 있다. 바로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뢰 말이다. (p.109-110)

 

이 대목을 읽으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했다. 당시 박유하가 쓴 책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모욕적인 내용으로 고소당했고, 검색해 보니 몇 부분이 삭제된 채로 재출판된 것 같다. 저자는 박유하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일본 전후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후 민주주의 또한 실패했으며, 그 실패를 굳건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과 1년 전에 이런 주장을 했으면 너무 과도한 걱정이라거나 혹은 무시할만한 의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미 실패한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최악이지만 최선이라는 민주주의, 그걸 굳건하게 믿는다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방송에 나와 우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국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위험할 수 있는, 어쩌면 상대방을 비판하고자하는 욕망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을 뱉고 싶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민주주의로 치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석열 정권이 탄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법을 이용해서 공정과 상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에게 신뢰를 느끼는 것처럼 법에도 신뢰를 느낀다. 하지만 민주주의건 법이건 아주 허약하다는 것을 202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이 난바라가 생각한 전후민주주의다. 일본 민족이 스스로의 정신 함양을 통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하고자 세계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계약에 기초한 국가 구성 논리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대립이나 갈등이 잠재하는 정치제도를 잔존시켜서는 안 되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공동체 형성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신 함양에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제도는 아무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도 갈등과 반목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전후 개혁의 중심에 자리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황실을 국민통합의 중심에 놓고, 그렇게 통합된 국민이 인류 보편 이념을 실현할 사명을 깨닫고 떠맡으며, 교육이 곧 그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장으로 성립하는 일, 이렇듯 난바라의 전후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가 결합한, 그야말로 숭고하고 고결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난바라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나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결합은 식민주의와 섬멸전쟁으로 이미 침식되어 있었다. 난바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는 야만과 해적이라는 비인간의 형상을 전제하는 법사상 계보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음 난바라의 발언을 보자.

 

일본 국가 최고의 권위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천황제는 영구히 유지될 것이며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천황제는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서 민족 결합을 근원에서 지탱해왔고, 군주와 인민 양측의 세대가 거듭해도 군주주권/인민주권의 대립을 넘어선 군민일체라는 일본 민족공동체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이것을 상실한다면 일본 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은 소멸할 것입니다.

 

난바라에게 천황제는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가 순수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국민통합과 민족공동체의 근본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이런 발언이 천황제를 정점으로 성립한 식민주의에 대한 무지와 무책임의 발로라 비판하는 일은 손쉽다. 하지만 전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난바라가 아시아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던 일을 상기한다면, 이 발언을 단순한 식민주의의 반복이며 무책임의 발로라고만 힐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더 근원적인 곳에 있다. 이 발언의 문제는 순수일본이 민족공동체로 재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난바라에게 세계는 ’여러 민족‘의 국가들로 이뤄진 인류공동체로 사념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p.133-134)

 

그러므로 난바라가 일본 민족을 인류라는 보편 이념을 선도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타민족도 모두 각자의 전통에 걸맞는 정신적 각성을 거쳐 보편 이념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아직 그런 민족통합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집단을 ’진보하지 못한‘, 이상적인 인류의 모습에서 탈각된 존재로 사념할 수밖에 없었다. 난바라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정신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무구한 열정이 타자에 대한 악의 없는 배제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형상은 아직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여 인류의 이념을 떠안을 수 없는 ’외지이종족‘과 중첩된다. 이것이야말로 보편주의와 결합한 식민주의다. (p.137)

 

이후 저자는 레오폴트 2세의 콩고 지배의 명분을 진보로 잡고 야만을 구제하려 한다는 것을 사례로 든다. 또한 이어 2015년 안보법제 개정에서 아베 정권의 적극적 평화주의의 근원적으로 음산한 폭력을 드러낸다. 분명 최근 수년간 일본의 움직임은 극도로 수상했고, 아니 어쩌면 너무 분명했고, 여전히 세상은 끔찍함으로 가득하다. 보편이라는 것. 누군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말이 인류가 만든 가장 역겨운 말이라고 했다.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보편과 특수(여기선 야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고결한 계획이었던 ’교육‘으로 이런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 글쎄, 불과 5년 전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연은 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넓은 시선에서 인류 역사는 질서를 위해 억압한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쪽이었다면, 20세기 이후 올바름을 내세우는 쪽이 도덕 혹은 윤리적인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난바라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내세우는 올바름 안에는 저자가 드러낸 윤리적으로 큰 결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 윤리적으로 큰 결함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올바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곳엔 민주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큰 맥락에서 세 번째 주제인 혁명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특히 이토의 이야기나 요도호 납치 사건의 사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떠나 혁명적 주장이라는 것이 음모와 스펙타클로 점철된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결국 1960대에서 80년대를 거쳐 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난 뒤 현실에서 이 혁명은 끝을 맺는다. 다만 저자가 이 주제들로 비평을 전개한 것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포스트 3.11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이다. 저자는 극우주의자들이 승리의 함성을 쏟아내고 있다고 본다.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내란의 픽션 상태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한국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의 상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국가들 중 한국만큼 성장한 국가는 없다. 윤석열이 망가뜨린 민주주의는 어쩌면 민주주의의 실체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픽션의 상태를 가정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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