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단숨에 읽고 느낀 첫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아름답다고 느낀 나조차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아름다웠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라는 인상이 이 세상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4년에 나는 처음으로 영화 스태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노동 문제에 관심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노동 문제는 딱 하나였다. 구조. 내가 말하는 구조라는 것은 피용자가 일을 하면 사용자가 가져가는 구조를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용자는 정해진 금액을 가져가는 반면에 사용자는 피용자가 일을 더 하는 만큼 가져간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용자가 가져가는 금액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한다. 그 기준을 어떻게 아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으로 혹은 계약서 상에서 정한 시간당 임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또한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이 구조가 폭넓게 잔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피용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주, 파견, 비정규직 등등의 이름 아래. 우리는 종종 법은 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겪은 세상은 법에 구멍이 있을 뿐 법을 만든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 거 같다. 난 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지한 내가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주제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회에서 입법이 되는 과정이나 그 과정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법은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제한할 필요가 있어서 만드는 것 아닌가. 노동법도 그러하다. 법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용자의 권리 또한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자와 피용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 대등하지 않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나도 대등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법은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던 말로 기억한다. 사용자와 피용자의 평화 관계란 비극이다. 사용자와 피용자는 끊이질 않는 긴장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에서 지향하는 대등한 관계도, 사회학자가 말하는 긴장 관계도 우리 사회는 허락하지 않는다. 갑과 을. 그건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관계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의 행사는 파업이다. 하지만 파업은 엄청난 법적 책임이 따른다는 걸 책에서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노조 자체가 없어서 파업을 할 수가 없는 직업들도 많다. 첫 번째 사례인 아파트 경비원은 당장 해고가 두려운 파리 목숨 같은 존재고, 두 번째 사례인 핸드폰 판매 노동자는 파업은커녕 빚 같지도 않은 빚(또 열받는데..)을 갚기 위해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방송국의 실태를 어느 정도 아는 나로서 세 번째 사례의 경우 정말 참담했다. 네 번째 사례의 경우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번째 사례를 제외하고 보면 모두가 단번에 이해된다. 욕망. 크게 보았을 때 사용자와 피용자의 관계가 만들어낸 계급 구조에서 인간의 욕망이 일으킨 파국이다. 첫 번째 사례는 권력의 폭력적 남용, 두 번째 사례는 금전 착취, 세 번째 문제는 돈과 권력이 함께 얽힌 일이었고, 다섯 번째 사례는 역시 돈, 여섯 번째 사례는 권력, 일곱 번째 사례는 돈, 여덟 번째 사례는 권력, 아홉 번째 사례는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인데 법 자체가 계급 구조(내국인과 외국인의 관계)를 옹호하고 있는 사례다. 열 번째와 열한 번째 사례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네 번째는 사건의 본질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정년을 앞당긴 것은 회사의 금전적 이익 때문일까? 근속이 쌓일수록 퇴직금 등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 이유였을까? 여성 노동 문제에서 등장하는 유리천장은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주장하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만 정년을 앞당기는 것은 어떤 이익을 위한 것인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단순히 가부장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뿌리 깊은 어떤 혐오에 의한 상황이었을까.
여하간 위 사례들 대부분은 구조가 만들어 낸 권력관계에서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피용자가 착취당한 사례들이다. 사용자가 기업으로 대표되는 사례가 아닌 경우는 그들이 법을 공부해서 법의 구멍을 찾아 악행을 저지른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용자와 피용자의 관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권력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했음이 분명하다. 사용자가 기업이라면 법의 구멍을 너무 잘 알고 그 구멍을 파고들어 권력의 우위를 선점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이유는 윤지영 변호사가 피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그러니까 피용자와 법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행위를 어떡해서든 막고, 노동자를 법 안으로 집어넣어 보호받을 수 있게 노력한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기록 그 자체만으로 건져낼 수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있을 수 없는 곳에 카메라가 있을 때 종종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최루탄이 난무하고 심지어 총알까지 날아다니는 그 현장에서 카메라가 가해자 쪽에 서있지 않고, 피해자 쪽에 서있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왜 항상 비극에서 건져 올리는 것일까. 끝내 풀리지 않는 모순이겠지만 어차피 이 끔찍한 세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건져올리는 이들을 응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