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미국 복음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8~19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대각성운동으로 형성된 미국 복음주의는, 그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특징에 따라 꽤나 강한 실천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회심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 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성향이 크게 달라졌다.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과 많은 사상자들은, 이 세상이 과연 낙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틈새를 치고 들어오는 것이 세대주의적 후천년설이라는 종말론이었다. 예수님의 재림 전 신자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휴거)이라는 믿음은, 이 “임시적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주된 관점을 사회의 연약한 지점을 개선하는 데에서, 개인의 거듭남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태도는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도 물러나게 했다. 사실 미국 복음주의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이슈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을까. 저자는 1960년대와 70년대 복음주의자들이 오늘날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낙태”에 대해서도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그 일에 관한 불가피한 상황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했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압도적인 반응은 침묵이었으며, 간혹 그 문제에 관해 의견이 표명되더라도 그런 의견은 모호했다.”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이 크게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은 다른 판결이었다. 1971년 그린 대 코널리 소송에서 컬럼비아 지방법원의 하급심은 인종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기관이 아니며, 그에 따른 면세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핵심은 ‘세금’이었다는 말이다.
법적으로 인종차별은 금지되었으나 남부의 다양한 주에서는 실제적인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밥 존스 대학교 같은 인종 분리학교였다. 미국 종교사에 관해 조금만 살펴도 꼭 나오는 학교인 이곳은 당시 흑인 학생의 입학을 불허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대학교도 다양한 면세혜택을 받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대학교가 자선기관이라는 분류에서였다. 일부 흑인 학부들이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어떻게 자선기관일 수 있느냐며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그 소송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는 그런 학교에 한 기부 역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기부금액까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으니 이중의 타격이었다. 당장 면세 지위를 박탈당하며 경제적인 손실을 입게 된 근본주의적 학교들은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정부기관인 국세청이 나서자 적당한 눈속임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낙태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하던) 기독교 보수가 정치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

꽤 흥미로운 해석이다. 그동안 낙태나 동성애 문제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들고 나오던 종교 우파가 실은 인종차별 조치를 개선하지 않은 대가로 받게 된 면제혜택 박탈이라는 벌칙에 반발해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도덕적 입지(라는 게 있다면)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저자의 주장은 조금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데, 제시된 내용은 미국의 종교 우파가 애초에 낙태에 별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기에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일부 지도자들이나 교단 등에서 발표한 입장과는 별개로, 실제로 초기에 낙태 문제를 가지고 세력 결집을 시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내용이 책에도 보인다.
실상은 낙태를 비롯한 전통적인 보수적 이슈들이 회자되긴 했으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정치운동화 하지는 못하다가, 인종차별과 관련된 면세혜택으로 학교 이사장 등의 영향력과 재물을 가진 이들이 나서면서 이 운동이 세를 크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어느 쪽이든,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흑역사는 회개해 할 죄이겠지만.

저자는 트럼프의 당선을 미국 기독교 우파의 원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결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애초에 인종차별과 결부되어 정치세력화가 된 그들이니, 인종차별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 또한 찬성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예로 20여 년 전 이명박의 당선을 한국의 기독교 우파 세력의 양심 파산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당시 내가 속한 보수적인 개신교 교단 신문에서 전국의 목사와 장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 조사에서, 차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도덕성과 윤리의식 대신에,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더 우위에 꼽는 결과가 나왔다. 목사와 장로들이 도덕적이지 않고, 비윤리적인 인물이라도 돈만 더 벌게 해 주면 대통령의 자질이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게 2000년대 중반, “긍정의 힘” 물결과 함께 대한민국의 보수 기독교계는 물신주의에 무릎을 꿇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그대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 나갈 수 있을까? 이 작은 책에는 그런 대안까지 차근차근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니 해결이 되기는 할 지 부터가 좀 회의적인 문제이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