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좀 길다. 하지만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매우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저자는 전통교회의 답답함에 관해 겪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온라인에 나누었던 것 같고, 그걸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각 장마다 말미에 해당 글에 대한 ‘댓글’들 일부가 발췌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다. 예배 순서, 청년부, 새신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 봉사에 대한 압박, 교제라는 이름의 부담(누군가는 준비하고 치우고 해야 하니까), 새벽기도의 압박, 수련회을 둘러싼 고생 등이 2부에, 직분과 목회자의 복장, 설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명이라는 이름의 압박이 3부에 실려 있다. 와우, 거의 뷔페상처럼 나올 만한 것들은 다 챙겼다.

기본적인 내용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달라진 상황에 맞게 변화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언급한 주제들은 사실 ‘진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담는 형식에 가까운 것들이니까. 상황이 달라진다면 내용을 담는 그릇도 바꿀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특히 저자는 예배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하는데, 이 부분은 평소 나 역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일예배 뿐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에 모이는 집회도 예배라고 불리고, 새벽마다 또 ‘새벽예배’를 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는 동시에 저녁예배도 진행하고, 365일 쉬지 않고 계속 예배를 이어간다는 걸 메인으로 자랑하는 선교단체도 있는 것으로 안다. 어디 그뿐인가, 이사예배, 개업예배, 장례예배, 신학교에 다닐 때는 무슨 교수 출판감사예배, 은퇴감사예배, 등등 온갖 사사로운 예배도 넘쳐나는 걸 봤다. 그냥 ~~식/예식이라고 부르고 기념하며 감사하면 될 일을 굳이 ‘예배’자를 갖다 붙인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말을, 수요예배 없애면 큰일 나는 이유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것이다.(얼마 전 내 유튜브 채널에 실제로 달린 댓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나왔을 때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취해야 하는/취하게 되는 자기를 낮춤, 상대를 인정하고 경배하는 태도, 또는 상태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다. 수요예배, 주일예배 할 때 붙이는 의식이름이 아니라.
이른바 새벽예배는 성경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새벽에 기도했다는 몇몇 구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다가 20세기 조선의 신자들만 알았다는 의미가 된다), 20세기 초반 조선의 농경사회의 시간 단위에 맞춘 의식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의식이라도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다만 바뀐 상황으로 이제 사람을 갈아넣어야 유지되는 수준인데도 계속 고집한다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교회’보다는 ‘과거 유지형 교회’가 되어” 간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조직이 날마다 모든 부분에서 새로운 걸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의외로 ‘안정감’이라는 요소는 조직을 유지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C. S. 루이스는 어떤 예배 형식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주 형식을 바꾸거나 변화를 꾀하지는 말아 달라고 쓴다. 익숙한 형식은 “훈련된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바뀌면 그런 훈련을 할 수가 없다. 사실 훈련이라는 것이 같은 작업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몸에 익히는 것이니까. 신앙은 ‘몸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다만 이런 안정성/보수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이 아니라, 내가 해 온 신앙 양식의 유일한 기준 됨을 고집하는 데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일탈을 겪게 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과 완전히 겹쳐진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교단 차원에서의 가이드라인은 필요하지만, 각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원만한 조율과 합의로 얼마든지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교회에게 주신 자유다.
물론 이런 합의가 쉽지는 않다. 책에도 저자가 교인들과 부딪히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고민이다. 목회자의 생각에 교인들의 습관을 바꿔 맞추는 게 최선일까, 아니면 그 공동체는 또 공동체대로 익숙한 방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도 자유의 일환은 아닐까.
전반적으로 쉽게, 그리고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잘 쓴 글이다. 여기 실린 내용들이 딱히 새롭게 나온 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조금은 회의적인 예상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사실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미 쉴 새 없이 변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예배의 양식과 신앙생활의 모습도 10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굉장히 생소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단순히 옛 것을 반복하기만 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곰곰이 새기며 함께 대화를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