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으로 전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었던 피케티의 근간이다. 그 사이에도 열 권 가까운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오랜만에 피케티의 책을 손에 들어 본다. “21세기 자본”에서 상속 등으로 형성된 금융 자본(사실상의 지대)의 수익률이 임금소득보다 월등히 높은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이번 책에서는 (제목처럼) 평등이라는 가치가 인류 역사에 어떤 식으로 등장해 퍼져나갔는지를 (생각보다는 짧지 않게) 정리해 낸다.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인류의 노력으로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좌파답게, “인류의 진보는 기정사실이며, 평등을 향한 여정은 승산 있는 싸움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이 늘 장밋빛이거나 레드 카펫이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는 평등을 향해 다양한 장치들과 규칙을 만들었고, 실제로 교육과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평등이 확대되어 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논지이다.

물론 이 과정은 앞서도 말했듯 매끄럽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노예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노예가 아니라!) 노예의 소유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했다. 또,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식민 본국은 막대한 빚을 과거의 식민지들에게 안겼다. 결과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식민지는 독립했지만(평등의 증가), 여전히 불평등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런 불평등을 강화하는 장치들이 공고화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여론을 형성하는 각종 미디어와 싱크탱크들은 독점화 된 부와 권력을 평등하게 이전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막을 힘과 의지가 충만하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부와 권력을 손에 준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저자의 단골 레퍼토리인 누진세 제도의 강화, 세금 도피처들을 돌며 희희낙락하는 탈세범들을 제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세금 부과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면 경제성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반론에 관해서 저자는 역사적 데이터를 가지고 오는데, 미국의 예를 보면 1870년부터 2020년까지, 오히려 누진세를 강화했을 때 경제성장률이 높았다는 것. 사회적 불평등을 일정 수준 이하로 만드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경제적 성과를 내는 데 영향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목소리가 과연 언제쯤 힘을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내서 반대자들까지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국가에 의한 생산 수단의 소유와 중앙집권화된 계획 체제라는 특징을 지니는 사회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전 세계적 범위의 초국가적 세금을 도입하는 것만큼 “중앙집권적이고 계획적인” 체제가 또 있을까.(저자도 자신의 주장과 비슷한 제안을 하는 프리오의 주장에 대해 “극단적인 중앙 집권 국가나 다름 없”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226)
책 후반에는 교육의 평등, 남녀 간의 임금격차와 사회적 평등, 종교에 대한 대우 등등 사회 전반적인 평등에 관한 조금은 짧은 주장들이 담겨 있는데, 이 역시 문제의 지적은 확실했으나, 실질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교육의 평등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공교육의 차원에서 구현해 낼 방법은 있을까? 얼치기 평등주의적 교육이론에 따라, 모든 아이들에게 (애초의 학업성취도와 상관없이) 똑같은 수준의 교육(이 경우 상대적으로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에게 맞출 수밖에 없다)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평등한 것일까?
물론 이 책에서 제시된 평등의 요구는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의 감각에 어울리는 일들이다. 하지만 평등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 자칫 그 또한 우리를 옭아매는 사상적 밧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등은 목적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