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간밤의 뉴스를 확인하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밥을 먹을 때도, 양치를 할 때도 끊임없이 새로운 뉴스를 게걸스럽게 찾아다닌다. 물론 그 뉴스라는 것이 무슨 정치나 사회 문제 같은 묵직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소품과 패션, 그냥 연예인 신변잡기인 경우도 많고, 유명인을 물고 뜯는 것은 특히나 인기가 많다.
10여년 전부터 우리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가 뉴스와 관련해서 등장했다. 페이크 뉴스(fake news), 이른바 “가짜 뉴스”가 그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유력 정치인이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로로 쉴 새 없이 이 가짜뉴스를 쏟아내며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분노를 조장하고, 격렬하게 상대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일을 트럼프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가 처음이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속한 정파의 특성상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런 증오의 행진에 기꺼이 동참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 교회에도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심각하게 파편화되고 분열되어버린 미디어 환경과 그 안에서 상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도움을 주기 위해 쓰였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집중한다. 세속적인 삶의 태도를 멀리하고 숲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살기도 했던 소로는 “머캐덤 도로”처럼 되어버린 정신을 경계한다. 이전의 도로는 얇고 크게 잘라낸 박석 같은 걸 까는 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시대는 돌을 잘게 부숴 도포하는 형태의 도로건설이 도입되었다. 소로는 세상의 바쁜 소식에 매몰된 사람들의 정신이 마치 그런 머캐덤 도로에 깔린 작은 돌조각처럼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음을 비판했던 것.
주로 1부는 현대의 복잡한 뉴스매체들에 몰입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우상숭배적 태도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시간에 관한 고전적인 구분을 다루는 2부로 이어지는데,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와, 직선적으로 흐르며 우리의 관심을 지금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에 집중하게 하는 “크로노스”가 그것.
2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독특한 해석이다. 저자는 선지자들이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는지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카이로스적으로 펼쳐져 있던 시간은, 크로노스적 시간을 중심으로 접히고 응축된다(멋진 표현이다).
3부에서는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이런 미디어, 뉴스 과몰입 상태, 편향된 정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저자는 흔히 제안되는 팩트 체크와 뉴스 피드의 다양화가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뉴스 밖 진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진짜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집 밖으로 나가 좀 걸으라는 말이다. 와우.

맨 처음 언급한 미국의 상황에서만 문제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최근 우리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는데,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이 부정선거라는 가짜뉴스에 매몰된 탓이었다. 지독히도 무능하고, 화려한 자리만 쫓아다니길 좋아하던 부인에게 끌려 다니며, 반대파들에게 (심지어 단순히 졸업식에서 구호를 외쳤던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끌어내는 식으로) 저열한 탄압을 하기를 마지않았던 그는, 그 가짜뉴스가 사실이라는 증거를 찾겠다며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문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그런 가짜뉴스를 좇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 기독교인들이 수두룩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사실이고. 적어도 이 점에서 만큼 교회는 거의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교회는 그들을 의미도 목적도 없는 데이터로 구축한 가상의 현실에서, 다시 실제의 살과 몸이 머무는 곳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