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kingdoms)을 보여준 후, 그 모든 권력(power)과 그 영광(glory)을 주겠다고 유혹했다(KJV 번역 기준). 그리고 또 다른 장면.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마지막 자락에 이런 구절을 덧붙이신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이 사탄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라고 칭해지는 보수적 정치관을 공유하는 기독교인 무리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찾고(얻으려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고발한다. 미국 복음주의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책 속 한 목회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미국을 숭배한다”고.

책은 제목에 따라 크게 3부(나라, 권력, 영광)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1부인 “나라”에서는 단순히 교회(댈러스제일침례교회, 플러드게이트교회)나 단체(모럴 머조리티) 단위만이 아니라 교단(남침례교)과 신학교(리버티 대학교) 차원에서 벌어지는 과도한 정치 종속(정확히는 트럼프로 상징되는 미국 극우 정파와의 결합)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파에 소속되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가 기독교의 중심 무대로 올라올 때다. 실제로 여기 소개되는 사례들을 보면, 교회 강단에 정치인을 세워 정치발언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이 과정에서 성경은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확하게 인용될 뿐이다. 심지어는 성경의 명백한 진술들은 무시되거나, 반대 주장이 환호를 받기도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희생된다. 정치와 신앙 사이의 긴장 관계를 고수하는 사람들, 희생자와 억눌린 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주장 속 모순과 허위를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학교에서, 교단에서 쫓겨나고, 사람들로부터 폭언과 따돌림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와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속사회가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고, 그 공포를 자극시켜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서게 만드는 사기꾼들(목사와 정치인)들이 있다. 저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는 첫 번째 단계는 기독교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미국 복음주의의 극우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난리를 일으켰던 이상한 목사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전범은 미국에서 진작부터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문제는 앞에 있는 그들만이 아니라, 이런 사태에 대해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왜곡된 정적주의에 빠져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도 이런 사태에 일조한 셈이다.
책의 저자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죽음 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상 반응들을 처음에는 그냥 넘기고자 했었다. 교회와 극우정파의 과도한 일체화에 경계를 했던 그에게, 일부 교인들은 사이버불링으로 대응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흥미로운 반응 정도로 여겼던 일들이, 실은 더 큰 위기를 예고하는 경고등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후회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크게 불거진 문제들을 보면, 어쩌면 이미 그런 경고등 점멸의 단지는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폭동을 선동하고, 폭력까지도 동원해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면서도, 시종일관 성경과 하나님을 운운하는 신성모독적 행위를 보면서도, 소속 교단은 제명과 같은 실제적인 조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고, 틈만 나면 “장자 교단” 운운하며 큰 규모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던 주요 교단들 역시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고 있다. 실은 내심은 그들에게 (폭력까지는 아니라도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에는) 동조하고 있기 따름이리라.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특정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세속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온갖 종류의 부적절한 타협이 정당화되고, 자연히 교회 내 다양한 범죄들도 은폐되고 만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을 텐데, 오늘날 교회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래도 작은 희망을 찾을 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치화된 교단과 교회로부터 배척당했던 이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2대에 걸쳐 리버티 신학교를 지배했던 팔웰 부자 중 아들은 결국 이사회에서 축출되었고, 남침례교단의 집행위원회에는 교단 내 추문과 문제를 은폐하려던 세력이 선거에서 패했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코너스톤의 교회는 기존의 교인들이 대거 떠난 자리에, 정치적인 문제에 좀 더 균형적인 시각을 원하는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물론 모든 상황이 이런 식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소망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권세를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분의 최종적인 승리를 담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이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모습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