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눈에 띤다. 크리스천과 무신론자라는 말이 이렇게 붙을 수도 있는 걸까? 오래 전 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용어 중에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었다.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모습은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아마 이쪽이 좀 더 학술적인 용어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명칭이 어떻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고백하는 신조와 그의 삶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초기 기독교의 여러 논쟁들은 이런 우리 삶 속의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것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나 펠라기우스 등과 했던 논쟁도, 그보다 후에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갈등도, 나아가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의 결별도 그리스도인의 삶/행동이 그들의 고백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중요하다. 그건 그들의 신앙이 맺는 열매이기도 하고, 종종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입으로는 무엇을 외치든 돈과 명성만을 좇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에게 신은 돈이고 명예일 뿐이니까. 이 책은 그런 삶의 중요성을 강하게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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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의 독특한 부분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보다는,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킬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저자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수치심을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나(2장), 근심과 걱정에 눌려서 다른 꿈을 꾸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8장) 하나님의 크심을 설명한다. 물론 여전히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10장), 전도를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사람들(11장), 변화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이들(7장)처럼 좀 더 익숙한 내용들도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조금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저자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될까 싶을 정도의 내용들인데, 생각해 보면 저자가 책에서 쓴 것처럼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자신을 꾸미는 식으로 쓰고 말 텐데 말이다.
다만 열두 개의 장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전부 “(크리스천) 무신론자”라고 불릴 만한 일일까 하는 의문도 살짝 들긴 한다. 물론 이런 부분은 수사적 도전이라고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1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이미 절판이 되어버렸다(난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각 장의 내용은 의미도 있고, 제대로 된 도전을 하고 있다. 전자책으로라도 좀 다시 내면 좋지 않을까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