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다신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이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학파’로 인식되면서 비로소 시작된 그리스·로마 지식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진지한 논쟁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세계에 어떻게 비춰졌는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종교적 충돌 지점은 어디였는지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이들의 비판에 대응하며 논변을 마련하고 교리를 가다듬으며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형성해나갔다.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기록을 남긴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 이해하였다. ‘미신’은 로마 세계 바깥에서 로마 세계 안으로 들어온 관행과 신앙”으로서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로마 제국에서 종교는 항상 ‘시민종교’로서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황제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체제 유지 기능과 연결되어 있었다. ‘팔레스티나에서 막 일어난 새 종교’는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공공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종교’의 원칙에 어긋났던 것이다. ‘경건한’ 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시민들로부터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종교 생활에서 등을 돌리게끔 하여 무신론으로 이끄는, 그 결과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었다.
2세기의 ‘과학자’ 갈레노스는 그리스도교를 ‘미신’이라는 틀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철학 ‘학파’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갈레노스를 시작으로 켈소스, 포르퓌르오스, 율리아누스와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핵심 쟁점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의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교 역시 “경건과 정의와 인류애”를 고취한다고 변론해왔다. “가장 박식한 철학자” 포르퓌리오스는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유일한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켈소스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곧 ‘최고 존재’에 대한 대항 신을 설정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은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옛 신들에게 돌아선” ‘개종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시행한 조치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조치였다. 그는 칙서를 발행하여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를 가르치게 하였고 파괴된 유대교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교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교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유대교가 종결되었다는 증거였다. 비록 실패하였으나,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의 체제 이념으로 확립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로마의 지식인들과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 예수의 위치,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 과 같이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될 문제들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논쟁을 계기로 새로운 교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니, 갈레노스의 비판에 응대하면서 만들어진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로마 종교가 제기하는 비판에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이 “필사적으로 대응”한 과정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이 그리스도교에 스며드는 모습,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그리스도교만의 역사로 볼 수 없는 이유이다. 후속 도서로는 로버트 루이스 윌켄과 유사한 관점에서 교리의 형성에 주목한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이 적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