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은 관동군의 전략거점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발상은 민족협화, 왕도낙토라는 이념으로 다양한 행위자들을 불러모아 “이상국가를 건국하려는 운동의 장”으로 포장되었다. 머리는 관동군, 몸통은 천황제, 꼬리는 근대 중국으로 구성된 ‘키메라’ 만주국에서 민족협화와 왕도낙토 따위의 이념은 분식에 불과하였을 뿐 만주국은 관동군 중앙독재의 ‘국방국가’였다. 변형을 거듭하여 완성된 모조(模造)천황제 만주국의 천황을 위한 전력투구는 만주국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반도를 확보해야한다는, 주권선과 이익선에 관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연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에 제기된 아먀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은 더욱 확장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국권회수운동과 국민당의 북벌에 직면해서는 “전쟁으로 전쟁을 유지하는” 총력전을 위해서, 나아가 세계최종전으로서의 일미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거점으로서 만주를 영유해야한다는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만몽영유론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만몽영유론은 육군 중앙부의 반대로 독립국가 건설로 전환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관동군 주도의 건국 공작은 육군 중앙부와 외무성의 통제 밖에 있었다.하지만 갑작스레 만주에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어야 하는 이유에 관동군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덧붙여진 정당화가 현지 세력을 동원한 건국 공작과 왕도국가론이다.
관동군은 장쉐량에 반대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성을 주장하던 세력들과 청조 복벽을 꿈꿔온 선통제파를 중심으로 하여 자발적 분리에 따른 독립국 건설이라는 방식을 취한 후 선통제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웠다. 동시에 만주국은 재만 중국인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성립된 독립국이어야 했기 때문에 관동군은 '자발적인' 건국운동 단체로서 자치지도부를 발족시켰다. 자치지도부는 장쉐량과 군벌, 국민정부를 모두 패도정치로 규정하고 민중자치의 왕도국가 건설, 일·조·중·만·몽의 공존공영이라는 민족협화, 안거낙업, 순천안민의 낙토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건국운동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자치지도부의 건국운동은 “메이지 천황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 진정 일본이 짊어질 대사명의 제일보를 이 인연 깊은 만몽의 땅에 내리려는 데 있다.”라고 하는 <지방자치 지도원 복무심득>에서 알 수 있듯이 천황제 국가 일본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짙게 밴 것이었고 이것이 만주국의 본질이었음은 만주국의 통치체제에서 드러난다.
관동군의 만주국 통치 기본방침은 만주국의 국방을 일본에 맡기고 일본의 말을 듣게끔 하여 "일만일체의 국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치지도부와 같은 건국운동 단체들은 퇴조될 수밖에 없었고 관동군과 총무청 중심의 중앙독재주의에 가까운 통치체제가 성립되었다. 이후 만주국은 두 가지 변화를 통해 ‘일만일체’를 이뤄가는데 하나는 1934년 제제만주국으로의 이행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의 진출이다. ‘2키 3스케’로 대표되어 전후 일본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들은 일본 각 성에서 파견되어 일·만 행정의 일체화를 꾀하였고 1937년에 이르러서는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통제경제를 주도하였다. 이렇게 일만일체를 이룩한 모조(模造)천황제 혹은 ‘상사형(相似形)’천황제 만주국은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식량 창고’로서 기능하였거니와 당초의 왕도국가, 민족협화로부터 멀어진 일본의 국방국가, 병영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왕도국가, 민족협화를 위해 만주국에 뛰어든 몇몇 자들의 순수한 신념까지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만주국을 만들어내고 변형시켰던 것은 일본 민족이 정치의식이 미약한 중국을 지도해야 하고 일본 민족이 아시아의 부흥을 주도해야 한다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극도의 ‘자민족 중심주의’였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야마무로 신이치가 규정하듯이 키메라 만주국의 몸통이자 근대 일본의 본질인 ‘천황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