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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소리
  •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오카모토 다카시
  • 13,500원 (10%750)
  • 2009-07-01
  • : 299

19세기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해오자 기존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동요되었다.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합의된 ‘국제법’이 기존의 동아시아 역내질서와 충돌하며 동아시아를 둘러싼 각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에서 조선은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이는 팽창을 국가의 목표로 삼은,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실현하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


조선은 건국 때부터 명과는 ‘종번관계’를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맺었다. ‘종번관계’는 “명을 군주와 아비인 종주국으로 숭앙하여 스스로 신하와 자식인 번속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고, ‘교린관계’는 대등한 국가 간의 화친을 의미한다. 일본도 아시카가 막부에서 중국과 ‘감합무역’을 전개하였고, 임진왜란을 거쳐 은을 중심으로 한 세력확장에 따라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조명(청)관계, 조일관계, 청일관계는 서구 열강이 ‘국제법’을 앞세워 동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책은 “근대 조선을 통해 본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동”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서구 열강의 ‘국제법’이 동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충돌이 일어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그 충돌에서 각국은, 특히 조선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청,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까지 개입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청은 국제법을 활용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전통적인 종번관계를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반면,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였다. 충돌은 이 지점, 즉 조선은 ‘청의 속국인가 자주국인가’ 하는 '조선의 지위' 문제를 두고서 일어났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회문에 포함된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내정 외교는 조선의 자주이다”라는 문구를 들며 자주국임을 주장하였다. 이 ‘속국’과 ‘자주’의 중간 영역에서 등장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이렇게 조선을 둘러싸고 세 나라가 세력균형을 이루자 부들러는 ‘조선 중립화’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중립화론은 조러밀약으로 물건너가고, 잠시간의 균형상태도 원세개의 청군 파병으로 무너지고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본은 무쓰 무네미쓰의 말처럼 “권력 평균을 유지”하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할 목적으로 개전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으로 규정하고 보호국화의 절차를 밟았으나 이는 삼국간섭과 이에 뒤이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다. 조선을 둘러싼 상황은 이제 청일의 공동보호에서 러일의 공동보호로 바뀌었다. 한편, 조선은 이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청과 대등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선포, 나아가 러일의 균형상태를 법적으로 고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에게 있어서 세력균형은 어느 한 나라가 확장의 조짐을 보일 경우 더 큰 사건으로 나아가는 연쇄작용이 불가피한, 임시적인 상황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러시아가 의화단사건을 틈타 만주를 점령해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바탕으로 전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동으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은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것도, 어느 한 나라에 기대는 것도 아닌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조선은 왜 세력균형을 유지시키지 못했나, 조선은 왜 부들러의 조선 중립화가 아니라 조러밀약을 선택했나, 조선 내부에서는 어떤 논의가 있었나.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19세기 후반 정치 외교사를 주로 서술”한 김종학의 <흥선대원군 평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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