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제자가 된다는 것>,<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바울을 읽다>,<인간이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낯선 면모를 오롯이 드러내보이며 독자들을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로 초대한다. 우리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가 지닌 낯선 면모를 제거하는 것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교와 멀어지게끔 한다. 오히려 그 자체로 낯설고 당황스러우며 기이해보이는, 그럼으로써 때로는 상처 입히는 그리스도교와 온전히 마주할 때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판단을 뒤흔’들고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성서를 읽으며 낯선 면모와 마주하여 하느님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새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은 역사를 읽을 때에도 낯선 측면을 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과거를 "성급하게 특정한 신학적 관심사와 영성의 옷을 입"히지 않고 정직하게 돌아볼 때, '영지주의'와는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은 과거의 요소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한 노력을 보게 되고 그 낯선 '과거의 요소들'이 지금 우리를 형성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듯 로완 윌리엄스가 그려 보이는 그리스도교는 낯선 세계이기에 독자들은 그의 글을 마치 새로운 언어를 익히듯이 읽게 된다. 예를 들어 평화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양육하며, 내어 주면에 동시에 받는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이고, 죽음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던 무엇인가가 치워지는 것”이다. 이 외에도 창조, 예수, 교회, 영원 등의 요소들과 그 전부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그리스도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마주했을 때 주어지는 '낯설음'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사를 그저 ‘크리스마스 카드감’으로 여기지 않고, '닿지 못하는 저편'에 대한 묘사로 받아들이듯이 지금 우리에게 낯설고 불편한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을 때, 경탄과 경이에 차 신앙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낯설고 불편한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로완 윌리엄스는 먼저 그 세계에 들어간 이들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분인지를 비추어주는" 그들처럼 살고 싶어 하고, 그들 안에 우리의 믿음을 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그렇게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신뢰함으로 길을 나설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는 낯설음을 간직한 채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의 배후와 표면 아래에" 하느님이 활동하는 이 낯선 세계에 들어오라고, ‘삶(생명)을 선택하라’고 초대한다. 믿는다는 것은 나도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로완 윌리엄스의 초대를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를 풍성히 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은 마치 외부인이 된 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이 그리스도교를 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로완 윌리엄스의 글을 읽으며 진리의 "엄격하면서도 장엄하며 사랑스러운" 면모를 배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