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문명국’ 반열에 오른 일본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총력전’이었다. 일본 육군은 총력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변모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거니와, 오바타 도시로와 이사와라 간지 등이 주장하는 ‘정신주의’에 의해서 묵살되었다. 더군다나 정치의 분산화를 꾀하는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일본은 총동원 체제로 변모하기에 적절하지 않았기에 ‘미완의 파시즘’ 일본의 ‘정신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보병의 ‘정신력’에 주목하였으나, 10여 년 뒤에 일어난 1차대전은 나카시바 스에즈미가 『전쟁 싸움에서 평화로』라는 저서에서 적절히 분석했듯이 “모든 산업을 국가의 일관된 의지 하에 움직이게” 하여 “바깥으로는 거대한 군수에 부응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는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것은 도쿠토미 소호가 개탄하듯이 경제 성장으로 인해 ‘벼락부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고, 오가와 미메이가 괴로워하듯이 ‘강 건너 불구경’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전술적 방침』이라는 책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육군은 1차대전의 성격을 적절하게 파악하였고 이후 군의 목표를 “과학력과 생산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일본 육군의 “냉정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과학력과 생산력’이 아닌 ‘정신주의’로 경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1차대전 이후 등장한 여러 군인들의 전쟁관을 소개하며 대답해나가는데,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도 이들은 일본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가진 나라’가 아닌 ‘갖지 못한 나라’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황도파’ 오바타 도시로가 보기에 ‘갖지 못한 나라’ 일본이 ‘가진 나라’를 따라잡겠다는 목표보다는 러일전쟁에서 효과적이었던 ‘정신력’에 기대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통제파’ 이시와라 간지는 ‘황도파’와는 다른 해결책을 주장하였다. 다나카 지가쿠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세계에 널리 펴는” 역할을 부여받은 일본이 언젠가 세계의 통일을 위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망상을 펼쳤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갖지 못한 나라’ 일본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야 했기에 만주사변이라는 무모한 군사행동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오바타 도시로의 길이든 이시와라 간지의 길이든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산업을 국가의 일관된 의지 하에 움직이게”끔 하여야 했으나, 군대 내에서만 한정되지 않은 분파주의가 이를 가로막았다. 일본의 ‘총력전’ 체제를 가로막은 이 분파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개념으로 지도자가 인민을 찍어누르는 ‘우시하쿠’와 지도자가 인민의 마음을 잘 읽고 이를 실현시키는 ‘시라스’가 있다. 메이지 헌법에 반영된 방식은 ‘시라스’였다. 천황이 ‘시라스’의 방식으로 통치하고 그 아래 군, 내각, 의회로 각각 권력이 분산된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총력전은 불가능하였다. 총리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한 ‘도조 독재’도 분권화된 제도를 어찌하지 못한 ‘미완의 독재’, ‘미완의 파시즘’이었다. ‘미완의 파시즘’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은 ‘일억옥쇄’, ‘천황 폐하 만세’의 ‘정신주의’였다.
일본은 1차대전 이후 ‘총력전’ 체제로 나아가려 했으나 메이지 헌법에 새겨진 정치의 분산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미완의 파시즘’이란 체제에서 ‘정신주의’로 나아갔다. 한 가지, 메이지 헌법에 새겨진 권력의 다원화, 분산화는 ‘시라스’의 통치 원리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결과이기만 했을까? 메이지 유신 전후 각 번 세력 간의 갈등과 분파주의, 천황 권력의 한계 등 역사적 과정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일본의 분파주의에 대해 좀 더 균형있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