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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소리
  • 러일전쟁의 세기
  • 야마무로 신이치
  • 8,070원 (6%250)
  • 2010-11-24
  • : 888

러일전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부르짖은 ‘문명화’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내보이는 동시에 이후 일본의 행로를 규정지은 역사적 사건이다. 러일전쟁은 전쟁 당사국 이외에도 영국, 독일, 미국, 유대민족 등 여러 행위자들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관련된 전쟁이었던 점, 선전전과 인종론이 전쟁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던 점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이기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환호와 서구의 주목을 받은 일본은 이를 뒤로 한 채 ‘총후체제’로 나아갔다.


저자는 일본의 근대를 국제관계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두 문명 세계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던 러일전쟁 전의 반세기와 일본이 세계와 본격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계기가 된 러일전쟁 이후의 1세기를 ‘연쇄시점’으로 설정한다. 러일전쟁 이전의 반세기 동안 일본의 국가적 과제는 ‘문명국’이 되는 것, 즉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를 목표로 하여 일본은 ‘비문명국’인 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를 대등한 ‘문명국’ 간의 국제법 체제로 바꾸어나갔는데, 이 과정은 서구가 만국공법을 ‘침략의 도구’로 활용하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문명국’을 향하여 달려가던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열강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동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이권과 ‘이익선’으로서의 조선과 만주를 노리던 일본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영국과 일본은 동맹으로 대응하였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이 대립 구도가 러일전쟁을 초래하였고 영일동맹에 힘입어 전쟁을 치른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게 된다.


러일전쟁에서는 선전전이 전쟁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는데, 일본과 러시아 모두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쟁을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쟁’,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도전’이라고 규정한 러시아의 선전은 전쟁에 ‘인종전’의 성격을 더하였다. 전쟁 동안 일본은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도전’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고자 애썼으나 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는 곧 ‘황인종’의 승리이자 전제정에 대한 입헌정의 승리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유학생이 모여들고 일본의 책이 번역되고, 일본인 교사가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지(知)의 결절 고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 혁명의 조류는 일본에도 흘러들어와 일본의 사회주의는 세계와의 ‘사상연쇄’ 속에서 비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회주의의 비전론과 아시아 국가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일본이 나아간 길은 ‘총후체제’였다. ‘총후체제’는 러일전쟁 이후 국가주의적 관념을 되살리고자 고안된 체제로서 “전토를 병영화하고, 군대 내의 질서를 사회에 가지고 들어와 국민을 ‘양병양민’으로서 생애에 걸쳐 관리하는 체제”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의무교육을 연장시키고 군인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돌격할 정도의 ‘정신력’을 강조하고 재향군인회는 국민을 동원하고 여성은 공장에서 근로하는 ‘총후체제’, 즉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두 문명 세계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던 일본이 ‘문명화’를 부르짖으며 달려나가 러일전쟁을 통해 달성한 ‘문명국’은 국가주의적 관념으로 얼기설기 얽혀진 ‘총후체제’였다.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과 세계를 ‘연쇄시점’으로 살펴보는 이 책은 당시의 동아시아사, 넓게는 역사를 어떻게 살펴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일본이 ‘문명화’ 끝에 도달한 ‘총후체제’는 이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미완의 파시즘>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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