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 해문클럽 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캐나다 최고 문학상인 스코샤뱅크 길러상을 받은 소설집으로 표제작인 <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을 필두로,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라오어는 이 책을 관통한다. 두 편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소설에서 한 번씩은 언급되어 있다. 라오어는 중국·티베트 어족의 캄타이 어군(語群)에 속한 언어. 라오스를 중심으로 타이 동북부, 베트남 중부 등지에서 쓴다. [표준국어 대사전 정의]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다.
책 속에서 라오어는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감추고 싶은 것, 또 누군가에겐 뿌리와 같아 지울 수 없는 정체성, 그들의 자긍심이기도, 또는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로 나온다.
실제로 작가 수반컴 탐마봉사가 한 살 때 라오스 난민촌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일, 그에 따른 경험과 감정이 소설 많은 부분에 녹아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문클럽의 선정도서였던 < 세 중국인의 삶 >에서와 같이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라오스계의 이민자들, 북미 사회에서 대체로 소수자이며, 하류층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서글프고 안타까우면서도, 또 따뜻했다. 냉혹한 현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가고 이겨내기도, 또 단념하기도 하며 다양한 갈등을 이렇게나 다양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하며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노인, 어린이, 여성 등 라오스 이주민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들이 무려 14가지의 짧은 소설로 쓰여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공통된 주제로 이렇게나 다채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다니. 번역도 매끄러워 좋았다. 그중 < 저멀리 있는 것 >과 < 지렁이 잡기 >가 가장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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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한마디만 할게. 꼭 기억해! 꼭 기억해야 해!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걸 깨닫지."
< 당신은 너무 창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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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는, 어떤 언어에서든 웃음소리다. 그의 웃음은 부드럽고 은밀했으며 따뜻했다. 어딘가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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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들면 엄마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우리는 어둠 속 까만 점에 불과했다. 아빠가 우리를 콘서트에 데려오기 위해 치른 대가를 떠올렸다. 그가 다른 사람의 가구를 들어 올려 포장한 뒤 우리는 결코 살 수 없을 집으로 배달하던 시간들을. 랜디 트래비스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집으로. 우리가 앉은 곳에서 무대 조명이 그들의 머리를 비추었고 그들은 환히 빛났다.
< 랜디 트래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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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시에 이런 차림이라니, 엄마는 대체 무슨 일을 구한 걸까. 한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돼지 농장엔 항상 일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바닥의 똥을 치우거나 작업대로 데려가기 직전 살아 있는 돼지를 씻기는 일. 혹은 수컷의 몸을 문질러 흥분시킨 뒤 짝짓기를 유도하는 일. 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가 구했다는 일자리가 그런 게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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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너무 역겹다고 소리 지르며 땅에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창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많은 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고, 엄마 덕분에 이 일을 얻게 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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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아직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머릿속에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나를 못난이라고 부르던 게 기억난다. 엄마는 외모를 자만하지 말라고 아빠가 그렇게 부른 거라고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직장을 구한 뒤에야 외모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외모가, 나쁘지 않게 생겼다면, 내게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하지만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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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 반대편에서 서서,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문구멍의 금색 테두리 안으로 보이는 그를 지켜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문구멍을 막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나의 눈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지렁이 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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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그녀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든 그것이 그 자리에 없다는 걸 뜻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