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북로그
  • 검은 꽃 (리커버 특별판)
  • 김영하
  • 9,900원 (10%550)
  • 2018-01-10
  • : 9,412
오직 두 사람을 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라딘에 검은꽃 리커버 한정판 알람이 떴다. 한정판 이런 것에 얽매이고 그런 스타일 아닌데 그날따라 냉콤 장바구니에 담아 빛의 속도로 결제를 했더랬다. 책장에 방치한 채 몇 달을 지내놓고 펼쳐 들었을 때, 남편은 대뜸 우울한 소설 아니냐고 물었다.
우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속상하고 화가난다는 표현만으로도 모자란, 그 시대를 지나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걸 감사하다고 하기에도 죄스러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뒤섞여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1904년 4월 4일, 대륙식민회사에 속아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로 향하는 일포드 호에 몸을 싣는다. 주변의 열강들이 동아시아의 운명을 놓고 사생결단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많은 돈을 벌어 꼭 조선에 돌아가리라는 단꿈에 부풀어서. 암묵적으로 남아 있던 조선의 신분제가 화물칸 밖에 없는 선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거대한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서로의 몸을 맞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한 달 반이 걸려 도착한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밟고 나서야 그들은 알게 된다. 속았다는 것을. 그 어디에도 학교며 시장이며 도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제물포보다도 못한 유카탄으로 오겠다고 그 험한 길을 왔다는 것을.
에네켄 농장의 노예로 팔려 간 그들은 악마의 발톱 같은 에네켄 잎을 잘라내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한낮의 햇볕은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말과 소에게나 휘두르는 줄 알았던 채찍을 맞아가면서 말이다. 비교적 구체적이지만, 담담히 그려지는 이들의 삶이 그저 소설 속의 일화일 뿐이었을까.
속았다 한탄하고 원망해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서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하며 그들은 여자도 아이도 할 것없이 엄청난 작업량을 해낸다. 오직 악착같이 돈을 모아 에네켄 농장을 벗어나리라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그 생각 하나로 버티고 견딘다. 그렇게 험난하게 버틴 4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돌아갈 고국은 이미 없다. 멕시코 혁명에 내몰려 죽음을 맞거나, 콰테말라 게릴라군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구원해 줄 나라가 없다.

약하디 약한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살고자 떠난 곳에서조차 대우받을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할, 그들의 입장을 보호해 줄 나라도 더이상 없는 그 상황에 가슴이 미어진다 해야할까,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해야할까. 속수무책으로 빼앗긴 나라를 탓해야할까, 자유가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품고 지도상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따라 배에 오른 백성들을 탓해야 할까.

분명 기가 찰 노릇의 엄청난 상황인데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객관적 입장을 고수하는 문체 덕분에 오히려 가슴이 더 먹먹하고 아렸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건 책을 펼치자마자 이정의 죽음이 묘사되는 부분을 읽고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실화가 바탕인 소설이라 현실은 더했겠지 싶어 해피엔딩을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는 게 더 씁쓸하다.


p.277
고국의 물정을 잘 모르던 멕시코 이민자들은 돌아갈 나라가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작은 종이쪽지를 꺼내들었다. 유카탄의 건조한 기후와 유랑생활로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그들을 한 달이나 제물포 항구에 붙들어놓았던, 대한제국 정부가 발행한 조악한 여권들은 이로써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p.295
이정은 가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화폐를 찍고 다른 돈을 쓰는 자는 죽인다. 살육이 살육을 부른다.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멕시코시티로 진격한다. 그것이 곧 이 길고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벌써 수십만이 죽었다. 이것은 국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대한제국이 있었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나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더 센 국가가,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약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내전을 지원한다.

p.298
알고 있겠지만 멕시코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1910년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예를 들어 여권이 필요하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하면, 일본 대사관으로 찾아오라고.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게 공관의 임무니까.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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