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님이 시집오시면서, 할머니가 다니시던 작은 장로교회에 따라 나가게 된 것이 어머님의 신앙 여정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제 신앙 여정 역시 어머님을 통해 시작되었지요. 어린 시절 제게 남아있는 교회의 이미지는 주로 “여름성경학교” “성탄 전야제” 같은 행사들과, 자주 함께 놀러다녔던 형 누나들과의 시간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의 이미지들을 내려두고 성서가 말하는 참된 교회상에 천착하게 된 것은 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해 성서 속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스스로가 제자가 되고, 또한 제자를 만들어 그 제자가 다시 제자를 만들어가도록, 이른바 “제자 낳는 제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소명이라 생각했고,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것이 전부인양 여겼습니다. 선교단체에서도 영혼들을 열심히 세워가고, 주말에는 지역교회에서 동일하게 그러한 작업들을 진행하려고 했고, 졸업 후에도 그것이 가능해야만 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졸업 이후 동일하게 교회 안에서 어린 청년들을 양육하려 하자 고민이 생겼습니다. 분명 제자 낳는 제자로 청년들을 키워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확신은 여전히 있었지만, “제자됨”이라는 것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주기 어려웠던 것이죠.
여러 서적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가장 분명하고 상세하게 정리해준 책은 예수전도단 홍성건 목사의 “섬기며 다스리는 사람” 이었습니다. 신칼빈주의로부터 촉발된 기독교 세계관 및 세계변혁적 관점에 의거해서 영역주권의 비전 즉, 영역을 변화시키는 제자로서의 삶을 촉구하는 책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당시 내린 결론은, 영역을 변화시키며 그 영역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제자, 그 둘의 조화를 통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명확하게 성경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충분히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고,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는 작업을 몇몇 서적과 성경적 근거 몇 줄만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기에, 나름의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성서신학의 발전과 함께 신/구약 성경의 중심주제로 주목받았던 하나님 나라 신학의 주요한 단행본들은 간략하게나마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더불어서 성서신학의 또다른 중요한 주제인 언약과, 새 언약의 중심약속으로 주어진 (렘 31:31-34 / 겔 36:22-28 / 욜 2:28-32)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에 대해서, 또한 영역주권 및 세계변혁적 관점의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도 여럿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간적 결론으로 도달하게 된 책이 바로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 였습니다. 존 스토트의 후계자답게 충분히 복음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에큐메니컬 영역에서만 다루고 있었던 선교의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작업들을, 철저히 성경의 바탕 위에서 진행한 대작이었지요. 이전부터 어렴풋이 내리고 있던 결론이 이 책을 토대로 분명해지는 경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선교란 창세기 1:26-28 이 언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명이 마 28:18-20 을 통해 회복 및 재해석된 것이며, 이는 우리가 행하는 직접적인 전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및 우리가 행하는 일들 역시 선교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음을 (물론 이것은 혼합주의 및 정복주의적인 패러다임으로 왜곡/오용될 여지가 존재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선교적 정체성으로 계속해서 재조정된다면 선교의 핵심적 방법론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또한 IVP의 BST 시리즈 선교 편에서 비노스 라마찬드라가 잘 지적하고 있는대로, “선교”란 일차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존재가 되는 것에 관한 것, 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을 준수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이중 계명을 따라 사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이지요. 20세기 초반에 칼 바르트는 이러한 존재들을 “증인”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신학의 존재 목적이 “증인으로서의 봉사를 지속하기 위함”임을 천명하였지요.
사실 기원 후 4세기 무렵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면서, 유럽 사회는 이른바 “기독교사회” 가 됩니다. 이 사건과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변화에 대한 논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굉장히 다양해서, 쉽게 한쪽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교회 내에서 “선교”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상실되었다는 지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국가의 중심적 기구로 부상하면서, 교회는 스스로를 구별된 존재로 규정하고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바깥 세계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보다는 중심적인 세계 안에서 제도화 되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역사로부터 보게 되는 분명한 결론입니다.
이후 가톨릭 교회의 신학 내에서는 각 신학 주제들이 함축하고 있던 선교적 역동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종교개혁 당시의 논의들, 즉 루터파/개혁파/재세례파에서 내세운 신학과 교회론에서는 이러한 선교적 역동성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신학 내에서 선교의 중심성이 다시 논의된 것이 유럽이 기독교사회를 벗어나기 시작한 칼 바르트의 시대부터 였던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시대의 변화가 다시금 빚어낸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전에 평신도들에 의해 주도된 세계선교 운동의 지대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이 책은 칼빈과 바르트의 개혁파 논의 선상에서, 특별히 칼빈의 논의를 확장하며 교회와 신학의 존재목적을 “증인” 이라는 선교적 목적을 중심으로 재정립한 바르트의 교회론을 참고하는 동시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선교신학자들인 레슬리 뉴비긴과 데이비드 보쉬의 논의를 이어받아 “제자됨” 과 “교회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철저하게 논증해갑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선교적 교회론의 권위자인 저자의 내공이 십분 발휘되어,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여러 각도에서 면밀하게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1장에서는 선교와 분리되어 있던 신학을 선교와 다시 결합하여 “선교적 신학”으로 재논의 하고, 2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소개하며, 3장과 4장에서는 선교를 중심으로 기독론과 교회론을 재서술합니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부분은 5장의 니케아 신조에 대한 해석인데요. 인상적인 구절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184-185p “나는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사도성”이란 단순히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사도적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사도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사도적 사역의 사명은 구원자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부르심, 회심, 그리고 복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야 말로 사도적 사역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사도적 증언을 지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계속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모든 문서들, 이러한 문서들이 가지고 있는 사도적 권위와 선교적 권위에 대한 인정으로 이해되는데, 정경화 과정은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다.
186-188p “사도적이고 보편적인 교회”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은 교회의 세계적이고 교차문화적인(cross-cultural) 선교명령을 지시한다…이렇게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우 다양하고, 다문화적이고, 다수의 언어를 사용하고, 다수의 조직으로 확장되는 것은 “카트 홀론”(kat’ holon) 즉 보편적으로(catholically) 발생한다. 그 중심, 공통 기반이 되는 “보편성”(holon)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서평자: ^^제도적인 “보편”이 아닙니다!!!!)
…맨 처음부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는 진실로 그것이 “사도적”이려면 “보편적”이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다문화적이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동일한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교회 조직을 만들었지만, 사람이 만든 어떤 위계질서에 복종하기 보다는 더불어 한 분이신 주님께 순복했다…어떤 문화도 보편 교회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에는 중심이 잡힌 다양성, 초점이 확실한 다양성이 존재했고, 신앙문답과 교회 조직, 그리고 예전과 예배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있었다.
189-190p “사도적이고 보편적이고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사도성은 교회의 거룩함 속에서 적절하게 표현된다…부르심이란 사도적인 증인의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전반적인 삶에서 그런 부르심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공동체가 만일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면, 공동체가 하는 모든 일, 공동체가 살아가는 모습, 돈을 관리하고, 사람들과 관계 맺고, 분쟁을 해결하는 이런 모든 모습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가운데 통치하고 계심에 대한 잠재적인 표출이고 증거다.
190-192p “사도적이고, 보편적이고, 거룩한, 그리고 하나된 교회”만일 “일치”(unity)가 선교적으로 이해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세상 앞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2:2)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권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전념하는 기독교세계에서 해방되어 교회의 선교적 소명에 토대를 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1장에서 4장에 이르는 “선교”의 의미 재정의와, 교회론의 “선교적 교회”로의 재구성은 이렇게 5장의 니케아 신조 논의를 통해, 교회의 전승 측면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며 일차적으로 정리됩니다. 이후 7-9장에서는 이러한 선교적 공동체의 형성, 삶, 그리고 리더십 형성에 대해 논의하고, 10-11장에서는 이러한 선교 공동체를 위한 총론적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선교적/복음주의적 에큐메니컬 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특별히 청년 공동체를 함께 일구어 가는 제게 도움이 되었던 7장의 몇몇 구절들을 인용하는데요,7장에서 저자인 구더는 복음서와 서신서의 많은 명령이 사실은 복수형으로 주어짐에 주목하면서, 계몽주의로부터 촉발된 서구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과거 전근대 사회의 억압을 해소한면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수행해나가는 것으로 몰고갔음을 지적하며, 선교적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삶은 공동체적으로 함께 수행되어야함을 천명합니다.
237p …우리가 사는 후기 기독교 사회라는 세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거대한 도전은, 하나님의 선교의 핵심이 되는 전략으로서 왜 교회가 존재하는지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기독교세계적 사고방식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지속적인 변화는 한 교회의 교인들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신학자들이 집단적인 선교적 소명이라고 기술하는 것을 가지고, 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기 시작할 때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239p …우리는 식별할 수 있고 복제 가능한 모델을 찾으려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교회 안에서 “선교적인 변화의 패턴들”을 조사해보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을 바꿨다. 이런 선교적인 변화의 패턴이 나타나는 신호는, 교회의 교인 한분이 우리에게 찾아와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저를 보내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때이다. 또 이런 고백을 할 때이다. “우리는 함께 모여 있기에 우리의 소명에 따라 더욱 신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함께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소명은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할 때도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정한 곳에서 행하길 원하시는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이 특정한 곳에 모였습니다”…
240-241p …회심이란 심지어 교회 안에도 조직적인 죄가 작동하고 있고, 교회가 환원주의적인 (서평자: 개인구원에 천착하며 개인의 필요를 채우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복음을 정당화시키는 일련의 수완들을 만들어낼 때, 그것들을 교인들이 처리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런 회심은 교인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반문화적인” 것이 되는지 그 의미를 명확히 말할 수 있을 때 발생한다. 그것은 성경공부에 참석한 사람들이 “예수가 의도했던 공동체”와 우리 교회의 실체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을 때 발생한다. 데이비드 보쉬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어째서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가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로 서구 신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242p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으면서도 총체적인 정의이다. 그것은 항상 복수의 개념으로 다뤄진다…증거 자체는 단지 이런 사람들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만큼이나 그들이 누구인가를 종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본문은 “너희가 증거들을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한다. 곧 “증인”이라는 것이다.
249p …그런 성경적인 공동체의 형성은 우리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사도적으로 세상 가운데 흩어지는 것을 연관시킬 것이다. 모인 공동체를 선교적으로 만드는 것의 시금석은 평신도들의 사도 직분이다. 우리의 관심은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있지 않을 때 어떻게 살고 있으며, 왜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일주일 중 하루의 시간을 떼 내어 함께 모일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주일 중 6일 동안의 시간을 사도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구비할 수 있는가에 있다.
250p …바울이 선교적 교회를 세워갈 때 또 다른 중요한 주제로 삼은 것이 “닮기”(mimines) 인데, 어떤 이가 공동체에서 닮을 만한 사람인가? 칼 바르트는 “공동체의 섬김”이라는 주제를 논의하면서 성령에 의해 보냄을 받은 공동체의 열두 가지 활동들을 목록으로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에게는 직제 사역(ordered ministry)에 대한 신학이 없다…반면 그는 신실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모델링과 멘토링에 관해, 그리고 멘토들의 은사와 견습 기간에 대해 한 섹션 전체를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이 놀라우면서도 또한 놀랍지 않은 것은, 우리가 “교회”라는 조직을 생각할 때 한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그림들이 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선교단체를 거치면서 선교를 위한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대해 경험해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러한 개념들이 그리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학과 조직신학 및 성경신학이 함께 논의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탓에, 이러한 논의가 전통적인 신학 내에서는 생소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 신학자였던 박형룡 박사께서 그분이 수학하셨던 구 프린스턴 신학교 (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의 영향, 특별히 코넬리우스 반틸의 영향으로, 바르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되면서 (구 프린스턴의 대표적인 신학자 메이첸은 바르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음에도) 한국 개혁신학 내에서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선교적 교회 논의의 선구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에큐메니컬 신학자라는 명목 하에 쉽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기에 (사실 뉴비긴은 여느 복음주의 신학자보다 더 복음주의 적입니다만), 교회론에 대한 재검토는 한국 교회 내에서는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현 상황에서도 두루 수용되기까지는 제법 먼길이 될듯해보입니다.
이런 지점에서 현재의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은 도리어 우리에게는 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는데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진 건강한 작은교회 연합(건작연)과 교회 2.0 운동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교적 교회 논의들을 통해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교회를 상상하고 기획하는 일단의 움직임이 한국교회 내에 확산되고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청어람/새물결아카데미/현대기독연구원/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등의 기독교 아카데미 내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논의들은 우리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를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다시 한번 빛나게 되는 것은, 대럴 구더가, 물론 바르트의 논의에 많이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개혁파의 관점에서 이러한 논의들을 잘 수용하고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칼빈의 교회론과 선교적 교회론을 비교하려는 움직임들도 있는데요, 고신교단 출신으로 교회 2.0 운동의 간사를 역임했던 황영익 목사님의 저서(레슬리 뉴비긴과 칼빈의 선교적 대화)는 보수적인 개혁파가 주류인 한국교회 안에 선교적 교회 논의를 확산시킬 수 있는 좋은 신학적 기반으로, 대럴 구더의 이 책과 함께 도움을 주리라 생각됩니다.
세상 속에서 “제자됨”과 그 제자로서 수행하는 “선교”의 의미, 그리고 그 지점에서 “공동체”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