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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 나의 작은 무법자
  • 크리스 휘타커
  • 17,100원 (10%950)
  • 2025-02-19
  • : 14,651


  삶이란, 어쩌면 가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각의 링인 것만 같다.  크리스 휘타커의  소설,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으면서 내내 떠올린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소설을 서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는 두 주역인, 어린 '더치스'와 서장 '워크'는 물론이고 과거의 죄로 인해 오랫동안 수인의 삶을 살았던 빈센트 킹과 더치스 가족의  커다란 위협으로 존재하는 '다크' 그리고 사랑을 잃고 그대로 낙망해 버려서 더치스에게 어린 시절이란 걸 잃게 만들었던 엄마 '스타'와 그녀의 아버지 '핼'까지도. 모두 내게는 저마다 각자의 링에서 오로지 홀로 삶과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복서(Boxer)로 보였다.
 과거에 마주한 비극 혹은 저지른 과오로 인하여 그들 모두가 상대하기가 만만하지 않은 불행과 혹독한 경기를 치르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마치  권투에 갓 입문한 선수가 첫 상대로 세계챔피언을 만난 것과 같은, 난이도 높은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은 단연 '더치스'였다. 비단 그녀가 가장 어려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과의 대전은 그래도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더치스의 것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녀가 자신의 작은 두 주먹만을 의지한 채로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불행의 주먹 세례를 연이어 받아야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출생이란 미명 아래 거기에 던져진 것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치스는 태어나자마자 도처에 고난이 매설된 불행의 지뢰밭을 오직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기나긴 궤적 위에 서도록 정해졌다. 하나뿐인 엄마는 자신의 고통에 허우적 대느라 의지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신뢰할만한 주위의 어른들이 있지도 않았다.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기에 혼자서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더치스는 엄마 쪽 조상 중에 무법자가 있었다는 걸 알고난 뒤부터 이름 그대로 자신을 무법자로 규정하고서 거기에 맞춰 살아가려 한다. 그녀에게 무법자란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닥친 고난은 스스로 처리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되어야 했다. 자기와 똑같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더 어린 동생 로빈을 위해서라도.
 소설은 그러한 더치스의 여정을 세밀하게 구현한다. 그녀가 로빈을 지키기 위해서 시간이 갈수록 한층 더 매서워지는 불행이란 강타(強打)에 맞서서 어떻게 버티고 싸워나가는 지를 말이다. 그 강타라는 게, 겨우 찾은 보금자리를 단번에 허물어버릴만큼의 잔혹한 것이라서 난 더치스가 과연 다음 라운드는 버틸 수 있는지, 마음 졸여가며 읽어야 했다. 
 그러나 소설엔 더치스의 여정만 있지 않다. 그와 비슷한 분량으로 더치스가 사는 '케이프 헤이븐'의 치안을 책임지는 서장 '워크'의 여정도 존재한다. 
 워크의 여정은 주로 더치스에게 가장 커다란 불행이라 할 수 있는 엄마 '스타'의 살인 사건과 관련한 추적으로 형성된다. 난 이러한 소설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작가는 왜 각각 다른 인물이 주역이 되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눠 소설을 빚어냈을까 궁금해진 것이다. 읽다보니, 더치스와 워크가 서로 다른 스타일로 불행이란 상대와 분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어쩌면 바로 이 차이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그 둘을 마치 대비해 보도록 구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더치스와 워크의 싸움 방식은 다르다.
 이것은 작가가 주역의 이름으로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단순 명사인 이들의 이름은 그대로 그들이 불행을 대하는 근본 태도를 집약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무법자는 그와 싸우고, 워크(Walk : 원서도 실제 'Walk'로 표기되어 있다.)는 그 안에서 묵묵히 걷는다. 이름 그대로 둘은, 대하는 방식이 정말로 다르다. 타인에 대해서도, 닥친 난관에 대해서도. 더치스는 핼 외할아버지처럼 의지해야 하는 사람에게조차 맹수가 으르릉거리며 위협하듯이 상대의 폐부를 마구 후벼파는 가시 돋친 말만을 쏟아낸다. 반면 워크는 더치스 남매에게 행하듯, 친근하며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려 노력한다. 더치스는 의심과 증오부터 품지만, 워크는 오랜 친구였던 빈센트 킹에게 그러하듯이, 한 번 신뢰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그 미음을 여간해선 버리지 않는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불과 얼음'이란 시가 있는데, 난 그 제목이 이 둘과 참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언제든 누구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더치스는 그야말로 들끓는 용암과도 같은 불이며, 사람과 사건의 진실을 향해 차분하면서도 성실하게 조금씩 접근해가는 워크는 '바다 위를 느리게 흘러가는 유빙(流氷)'과 같은 얼음이라고 말이다.
 이토록 선명하게 대비되기에 난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엔 작가의 의도가 깔려있다고.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둘은 정말 대조되는 결말을 맞이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더치스가 그렇게 싸워야만 했던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간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계속해서 그런 방식을 고집해도 괜찮은 걸까? 거기에 작가가 부정적이라는 것은 소설 도처에서 나타난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결정적으로 가져다 준 계기는 바로 더치스의 무법자로서의 자세에 있었다. 더치스는 전혀 다른 삶의 색깔을 누려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순간의 격정을 참지 못하여 망치고는 언제나 뒤늦은 후회를 했다. 심지어 오해로 인해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를 해치고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동생과도 결별하게 된다. 더치스의 여정은 갈수록 파국이다. 그러니 작가가 이와 같은 싸움 방식을 권하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워크의 여정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사건의 진실에 유일하게 이르는 사람은 그이고 언제나 그리워하고 있던 옛사랑 마사 메이와도 다시 이어진다(소설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으나 마사 메이는 워크에게 늘 두번재 기회를 줄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토머스 노블을 제외하고 워크만이 유일하게 타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것도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토머스 노블과 워크를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데, 더치스에게 헌신적인 토머스 노블은 한 쪽 손을 못 쓴다. 이와 똑같이 워크 또한 오른 손이 자주 떨린다. 그들은 타인을 대할 때 항상 그 손을 숨기는데, 그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은유라고도 볼 수 있다. 남들에게 쉽게 내비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고통을  더치스처럼 그들 역시 가지고 있다는걸 뜻하는.  그걸 하필이면 '손'으로 나타내는 것은 신체의 일부는 항상 자신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서, 포용하는 가운데 묵묵히 견뎌나간다는 것의 암시라고 볼 만하다. 작가는 이것을 노블(Noble)이란 이름으로 드러내듯이, '고귀한 태도'임을 내비친다.
 토마스 노블과 워크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행로를 단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내'와 '변화의 수용'이다. 그들은 더치스라면 분노를 드러냈을 순간에 참는 것을 택한다. 그 인내를 바탕으로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를 품으려 시도한다. 가시가 돋친 말로 자신의 갑주를 두르지 않고 말이다. 더치스에게 마지막으로 보살핌의 둥지가 되어주는 돌리도 그러했듯이.
 그렇게 그들은 타인이 가져온 변화를 받아들인다. 타인을 격리시켜서라도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려했던 더치스와 다르게.  이건 워크에게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래 워크는 누군가 주택 수리 신청을 해도 그걸 갖가지 이유의 이의 신청으로 무마시킬만큼 자신의 동네가 변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추적하는 동안 점점 더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바뀌어 간다. 결국 그만이 사건의 진실을 오롯이 거머쥐게 되는 것도 인내를 초석으로 하는 관대함과 스스로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려고 한, 상황에 대한 유연한 태도였다. 
 이는 같이 학창시절을 보낸 정육점 주인인 밀턴이나 브랜던 록과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성기라고 생각하는 과거에서 전혀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스타'의 옆집에 살고 있는데, 하나같이 '스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스타'는 이름처럼 학창시절 최고의 인기녀였고 그들에게 스타를 가진다는 것은 곧 과거의 자신으로 회귀한다는 걸 뜻했다. 어쩌면 더치스가 그토록 로빈을 지키는 것에 집착했던 동기도 이들이 스타에 집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른에게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여 평범한 어린 시절을 깡그리 잃어버린 로빈에게 자신의 헌신을 통하여 그걸 되찾아 줌으로써,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이 바랐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로빈을 지켜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말이다. 그 밀턴이 법의 바깥에서 자신의 힘으로 정의를 관철하는 자경단에 천착한다는 점이 언제나 무법자로 자처하는 더치스와 비슷하기에 더욱 이들과 더치스의 유사성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밀턴의 최후는 과거에 완전히 잠겨버렸다는 것의 비유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혹여 더치스가 자신의 싸움 방식을 계속 고수했을 경우,  직면하게 되었을 마지막이라는 것을 작가가 암시하려고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소설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이다. 적당히 끝을 시작의 새로운 계기로 여기라는 뜻 정도로 여기면 될 것 같다. 여기에 비추어, 이 소설이 가진 이채로운 구성과 서로 다른 성격의 여정 구현 방식 그리고 이름들의 대비와 인물들의 유사성을 감안한다면 결국 소설 전체는 제목에 뒤이어 따라 올, 필연적인 질문인 '어떻게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작가가 나름대로 제시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한다. 소설 속 장면을 인용해서 말한다면, '좁은 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200만 에이커의 자유를 품에 안는(p.556)법'을 말이다.
 삶에 배태된 불행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든, 많든 사람은 다양한 불행을 마주하며 상처와 신음 속에서 무력감만 날로 더해가는 일상을 영위하기 십상이다. 누구라도 언제든 끝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이 침잠하고 있는 화두는 나와 거리가 결코 멀지 않다. 언제든 나 또한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라도 빌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 그 때를 위해서라도 이 소설과의 동행을 통하여 내 나름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고 부른다'는 로알 아문센의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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