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엔 밝음과 어둠이 있습니다. 원자력에 원자력 발전이란 밝음과 핵폭탄이라는 어둠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나노와 AI의 기술 역시 그 중 하나일 겁니다. 그 기술을 특히 의료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죠. 체내에 주입해 자율 활동으로 몸 안에 있는 병원체라든가 암세포 같은 것들을 분석, 정확한 대응을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를 통해 불치병까지 치료할 수 있으리란 전망입니다. 하지만 그 밝음만큼 어둠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오드토머스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의 장르소설가 딘 쿤츠는 그 어둠에 집중하여 일련의 시리즈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5권까지 발간된 제인 호크 시리즈입니다. 전직 FBI인 여성 제인 호크가 주인공인 시리즈죠. 그 제인 호크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이라 불리는 집단과 단신으로 맞서 싸웁니다.
미국의 정재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소수의 인물들로 이뤄진 그 집단은 어둠 속에 숨어 자신들이 가진 나노 기술로 자신들이 우두머리가 되는 전체주의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노 로봇들을 호박색 액체 상태로 사람들 체내에 주입하여 그들의 두뇌에 오로지 복종하는 것만이 전부인 노예로 만드는 세뇌 프로그램을 부팅시키는 것이죠. 이러한 '나노웹 기술'을 통해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똑같은 노예 사회가 다시 도래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아르카디언이라 부르는 것이죠.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가 생각했던 유토피아의 이름이니까요. 오로지 그들의 성적 환락만을 위해 멀쩡한 여성들은 나노 기술로 성노예로 만든 곳도 소설엔 등장하는데, 거기 이름은 '아스파시아'입니다. 이 역시 고대 그리스에서 따온 것이죠. 아시다시피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생이자 페리클레스의 정부인 여성의 이름이니까요. 이처럼 이들은 그리스를 동경합니다. 철저하게 신분이 계급화된 사회를. 한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진술에 따르면 이미 16,000명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 역시 평민, 가축 등등의 계급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군요.
그 분류에 따라 그들은 테크노 아르카디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일례로 '아스파시아;에서 성적인 봉사만 하거나 그들의 시설이나 자택을 지키는 충실한 경비견 노릇만 하는 것이죠. 때로는 단지 재미를 위해 자살을 당하기도 하며 사회적 혼란을 부추길 목적으로 평화적 집회에 숨어들어가 자폭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한 평화적 집회에선 노예가 된 이들의 자폭으로 300명이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한 머디로, 노예가 되면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오직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이익과 재미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구부러진 계단'에서 나노웹 기술의 새롭게 희생자가 된 타누자와 산자이 남매처럼.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제인 호크뿐입니다. 이제 FBI도 아니라 일개 평범한 시민에 지나지 않는 제인 호크만이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토안보부뿐 아니라 FBI, 경찰력까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테크노 아르카디언과 홀로 맞서고 있는 것이죠. 가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만합니다. 그것도 타노스 급의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형국인 것이죠. 게다가 그녀는 커다란 약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 트래비스 또한 아르카디언의 마수로 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죠. 이토록 약점이 많은 제인 호크이지만 그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전혀 꿀리지 않습니다. 아니, 전적만 보면 아르카디언의 완패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녀의 돌팔매는 지금까지 골리앗의 약점들을 제대로 공략했습니다. 그 결과 음모를 알아냈고 보다 상층부의 인물들을 하나씩 찾아 처리할 수 있었죠. 이것이 '사일런트 코너'와 '위스퍼링 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인 호크는 이제 보다 더 윗선에 이르렀습니다. 사이먼과 헨드릭슨 형제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아르카디언 역시 손을 놓고 있진 않습니다. 그들은 제인 호크를 잡으려면 아들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추적을 개시한 것입니다. 은밀하게 미국 권력을 장악한 그들답게 마수는 순식간에 트래비스에게 뻗쳐오고 제인 호크의 부탁으로 트래비스를 보호하고 있었던 군인 출신 부부, 개빈과 제시카는 트래비스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리즈 세 번째 작품, '구부러진 계단'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돌아가며 전개되는 셈이죠. 하나는 타누자 - 산자이 남매 이야기, 다른 하나는 제인 호크의 추적 이야기 또 다른 하나는 트래비스의 도피 이야기.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구부러진 계단'만이 가지는 이채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타누자 - 산자이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노웹 기술이 어떤 식으로 사람의 의식을 완전히 바꿔놓는지 마치 1인칭 시점으로 그걸 목도하듯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타누자 - 산자이 남매뿐만 아니라 후반에 이르면 아르카디언 주요 인물의 내면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나오기도 합니다.(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습니다.) 제목의 '구부러진 계단'은 이것의 정점에 있습니다. 그건 아르카디언을 탄생시킨 하나의 태고적 장소임과 동시에 나노웹 기술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기반으로 사람의 이식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건 제인 호크를 '구부러진 계단'으로 이끄는 인물이 혼잣말처럼 떠드는 다음과 같은 말에 집약되어 있지요.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놀고, 아무도 내가 혼자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지.'(p. 330)
아마도 그렇기에 작가는 제인 호크를 엄마로 만든 것 같습니다. '구부러진 계단'은 딘 쿤츠가 왜 제인 호크를 모성의 존재로 만들었는지 잘 알게 하는 작품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뚜렷하게 대비되는 모성의 모습이 나오니까요. 제인과 반대되는 모성은 지속적으로 자기 자식들에게 단절을 가르칩니다. 사람의 관계란 오로지 지배와 복종밖엔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제인의 모성은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죠. 그녀는 헌신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키려 하니까요. 제인은 아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반대의 모성은 그렇지 못합니다. 반대편의 자식이 기억하는 모성은 오직 공포와 폭력 뿐이죠. 세뇌 당한 타누자 - 산자이 남매가 마지막에 했던 것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딘 쿤츠가 '구부러진 계단'에서 이토록 모성의 대비를 뚜렷하게 연출한 것은 아마도 다음 편 때문일 것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금지된 문'에선 이 두 모성 사이에 전면전이 펼쳐질 것 같으니까요. 나노웹 기술이 주입된 이들이 마치 영화 '킹스맨'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량으로 폭동을 일으킨다고 하니 말이죠. 그런 장애물을 뚫고 제인 호크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미국 대륙을 횡단해 나가야 합니다. '구부러진 계단'은 그 전면전을 위한 징검다리로 나노웹 기술의 끼치는 영향을 상세히 기술하여 네 번째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보다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도 있구요. 네 번째에서 제인이 직접 아들을 구하게 되는 건 바로 여기 세 번째에서 두드러진 모성의 대비를 자연스럽게 보다 명확하게 하는 것이겠죠.
여하튼 여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고 네 번째 작품을 잔뜩 기대하게 했습니다. 과연 다음 번에 펼쳐질 제인 호크의 전쟁은 어떤 양상일지 궁금하네요. 무엇보다 대규모 전이 예상되리라 더욱 그렇습니다. 부디 다음 권이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네요.
['구부러진 계단'의 미국판 표지, 여기선 제인 호크의 모습을 볼 수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