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고양이 요람
  • 지문
  • 이선영
  • 12,600원 (10%700)
  • 2021-04-05
  • : 206


잣나무가 울울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서 산행하기에 적합한 청우산에서 심하게 부패한 여성 변사체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신작 미스터리 소설, '지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신의 상태를 보아하니 실족사로 보이는 정황. 하지만 얼마 전에 서울에서 사람을 보이는 대로 너무 믿었다가 세게 뒤통수를 맞아 좌천까지 당해 이곳의 지방 관할로 내려온 형사 백규민은 시신 근처에 신발이 없다는 점 때문에 사인을 의심합니다. 과연 떨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엔 죽은 여자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안엔 유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증오하면서 사랑한다'(p. 25)


 한편, 장면이 바뀌어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윤의현에게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녀가 얼마전에 실종 신고를 한 동생 오기현의 시체를 찾았다고 말이죠. 시신이 정말 동생이 맞는지 확인하러 간 자리에서 만난 규민에게 윤의현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살이 맞는 건가요?(p.30)


  자꾸만 자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윤의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보이는 대로 믿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는 규민은 의현에게 개인적으로 끌리는 것도 있어서 사건 종결을 뒤로 미루게 됩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병행하면서 전개합니다. 하나는 물론 오기현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윤의현이 강사로 일하는 대학에서 발생한, 이민흠이란 교수가 예나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는 백규민이 주역을 맡고 후자엔 윤의현이 당담합니다. 한때 윤의현은 이민흠의 편에 서서 학내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지 이번엔 예나를 직접 찾아가 시사 방송에 나가도록 권유하고 이러한 공론화를 통해 사건 때문에 휴직 중이던 이만흠이 아무렇지 않게 교직으로 복귀하는 걸 막으려 합니다. 처음엔 이 둘이 너무나 다른 사건이므로 왜 작가가 이렇게 병행하는지 의문이 듭니다만, 놀랍게도 후반에 가면 이 둘은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귀가 딱 맞게. 전혀 다른 사건 같았던 것들이 알고 보니 하나의 사건이 가진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미스터리 작품을 통해 얻게되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재미를 이 소설, '지문'을 충분히 만끽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백규민이 마주한 미스터리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오기현의 삶 자체가 복잡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친자매인 것 같은데 왜 언니와 동생의 성이 서로 다르지?'하고 말이죠. 둘은 친자매가 맞습니다. 그런데 둘의 부모가 오기현이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죠. 어머니가 기현을 데려갔고 지금의 아버지, 오창기와 재혼했습니다. 그래서 성이 다른 것이죠. 한편 오창기는 꽃새미 화원을 소유한 부자로, 그가 사는 동네 사람과 경찰마저도 굽신굽신하는 유지입니다. 그러나 안좋은 소문이 돕니다. 오창기가 오기현을 학창 시절부터 학대했다는 것이죠. 그걸 확인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꽃새미 화원에서 일하는 신명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줌 싼다고 맞고, 운다고 맞고, 처먹는다고 맞고(p. 104)


 그런데 이렇게 말한 신명호 또한 오창기가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무 살 이후로 오창기에 의해 꽃새미 화원에 갇혀 누추한 거처에서 아무 보수도 받지 못하고 몇 십년을 화원에서 일했습니다. 얼마 전 세간을 충격 속에 빠뜨렸던 염전 노예와 마찬가지인 신세였던 것입니다. 신명호는 오기현이 학대 당할 때마다 오창기를 막으려했는데 그 때마다 오창기는 약물 주사를 놓아 무력화시켰습니다. 물론 주위엔 신명호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말해두었구요. 이런 식으로 오창기의 범죄는 오랫동안 은페되어왔고 아무래도 그것이 기현의 죽음과 많은 관련이 있어 보였습니다.


 자, 이것으로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과연, 오기현 죽음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이 둘의 해답은 놀랍게도 정확히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지문'은 근래 읽은 한국산 미스터리 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소재가 그리 신선하지 않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작가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신선한 요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문'은 스릴러처럼도 보이지만 아마도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른바 범인을 찾아가는 'WHODUNEIT' 장르 말이죠. 이런 후더닛 장르에선 엘러리 퀸이 그랬듯 얼마나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느냐가 작품의 성공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공정한 게임은 작가가 작품 곳곳에 범인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여 주의 깊은 독자라면 작가가 밝히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여야 인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충분히 공정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읽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전 두 번 읽어보니 단서가 여러 곳에서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것이 뭔지 밝힐 수 없어서 아쉽군요. '아니! 이런 것도 단서였어?'할만한 것들이 있는데 말이죠.


 이 소설엔 반전이 무려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물론 범인에 관한 것이죠. 분명 단서를 놓치셨다면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두번째 의문 -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 연관된 것인데 이 반전은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 전 범인은 예상했는데 이건 정말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작가의 재주가 아주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느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가장 만족스런 한국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더군요. 두 개의 반전이 독자에게 가져다 줄 충격을 위해서 작가는 서술 트릭을 썼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썼던 방법말이죠. 이 소설을 재밌게 읽으셨다면 '지문'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좋은 얘기만 마구 쓴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척박한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풍토에서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나고 보니 없는 말, 있는 말 마구 지어내서라도 한껏 응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 과한 칭찬에 눈살이 다소 찌푸려지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여하튼 이선영 작가의 다음 미스터리 작품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열화와 같은 응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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