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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최혜진
  • 16,200원 (10%900)
  • 2021-10-15
  • : 2,407

팔레트를 든 철학자들과의 대화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후기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는 것은 정말이지 부끄럽고도 미안한 일이다. 한 권의 책 속에 응축된 저자의 사상과 신념, 출판노동자들의 수고를 몇 마디 말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을 다루는 책’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얼마나 부담되는 일일까?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열 명의 그림책 작가들의 삶과 그들의 수많은 그림책에 대해 따듯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감히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그림책 작가 2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감상을 남겨둔다.

권윤덕: 경계짓지 않기

작가 권윤덕은 민중미술운동을 하다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작가들을 인터뷰한 저자 최혜진은 그림책에 (당연한 것이 없기에 쉽사리 체념하거나 냉소하지 않는 아이들 같은) ‘돌파하는 힘’이 있다고 했는데, 권윤덕은 그에 어울리는 인생을 살았다. 운동을 접고 시댁 생활을 하며 시부모님 간호에 남편 뒷바라지까지 하고 있던 그녀에게 그림책은 낯설고 어려운 도전이었다. 그는 위기를 기회 삼아 집안 공간을 소재로 그림책 『만희네 집』을 시작으로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권윤덕은 사회문제를 다루는 그림책을 여러 편 펴냈다. 한중일 평화 그림책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꽃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했고, 『씩스틴』은 5·18, 『나무 도장』은 4·3, 『용맹호』는 베트남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사건들을 그림책에 담는 권윤덕의 사려 깊은 시선은 굉장히 놀랍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씩스틴』을 위해 권윤덕은 5·18이 민주화운동임을 부정하는 극우 유튜버들의 영상을 굉장히 많이 시청했다.(36p) 기계적인 중립을 위함이 아니다. 권윤덕은 그들의 생각이 어떤 환경, 어떤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권윤덕은 고정된 피해자의 시선을 선택하기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윤덕의 태도는 작품의 시점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씩스틴』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시민에게 발포된 소총 M16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또한 『꽃할머니』를 만들던 이야기에서 성폭력 피해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지나가듯 언급하고, 육식 문화를 성찰하게 하는 『피카이아』를 다루면서도 ‘페미니즘’이나 ‘비거니즘’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세계에는 ‘-이즘’이 없는 것이다. 권윤덕의 태도를 닮았을까,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의 그림 속 붓선은 경계를 짓지 않는 선일 것만 같다.

권정민: 자리를 뒤바꾸기

작가 권정민의 말 속에서는 ‘한계’와 ‘제약’이라는 목적어에 ‘다룬다’는 서술어가 결합한다. “‘나는 이걸 못해. 이런 것이 부족해’라는 인식이 찾아올 때,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라고 질문하면서 어떻게든 한계와 제약을 다루는 방법을 찾아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그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권정민은, 그 한계와 제약을 다루는 방법을 찾기로 한다. 그렇게 그의 첫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가 탄생했다.

권정민은 주제보다는 형식에 방점을 찍는 편이라고 말한다.(294쪽) 뒤틀고 역전시키는 형식이 적용된 그의 그림책은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다. 권정민이 그의 그림책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자리를 자꾸 뒤바꾸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그림책에는 자리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주인공이 된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서는 도시에 들어온 멧돼지가,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에서는 식물들이 주인공이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은 흔한 반려동물과 인간의 풍경에서 양자의 자리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지혜로운···』은 일종의 끔찍한 계시 같았던 보도사진으로부터 출발했는데, 중학교에 출몰했다가 사살된 멧돼지의 시신을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둘러싸고 있는 사진이었다. 강렬한 멧돼지의 이미지는 선배 멧돼지가 후배 멧돼지에게 생존의 방법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 형식의 그림책을 낳았다.

권정민이 ‘한계’를 ‘다룬다’고 말했듯,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이전까지 생각해본 적 없던 길을 트는 것이다.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외치기보다 신선한 충격으로 설득하는 그의 능력을 질투하게 된다.

열 명 모두의 인터뷰에서, 묻는 최혜진과 답하는 작가들은 영화 대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상깊은 말들을 주고받는다. 최혜진은 이들의 작품을 전부 꿰고 있다. 그의 질문은 작가의 생애주기별 작품 세계를 통찰하는가 하면, 인상 깊은 주제나 구절을 서슴없이 꺼내놓는다. 페이지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인터뷰 현장의 사진들을 보면, 이들의 대화가 일종의 팬미팅과 같았으리라 짐작하며, 만난 적 없는 그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림책을 ‘귀엽다’, ‘순수하다’ 같은 ‘아동스러운’ 수식어로 말해온 사람들은 이 책에서 팔레트와 붓을 든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시 한번 그림책을 펼쳐서 판타지가 등장하는 순간을 살폈다.(…)
(…)이런 전복의 서사가 간절한 이는 누구일까?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 필요한 사람, 기성 논리에서 소외된 이들,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P307
우리가 타인과 사회라는 관계망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자기다움을 말하는 일은 쉽다.- P181
"사는 게 다 이렇지", "해보나 마나야", "그냥 대충 적당히 사는 거지" 같은 체념의 문장은 어린이의 것이 아니다. 아이는 세계를 믿는다. 믿기 때문에 냉소하지 않고 성장한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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