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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를 지우다
  • 제이슨 스탠리
  • 16,200원 (10%900)
  • 2026-01-26
  • : 980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부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사태에 이르는 수 년간, 역사학계‧역사교육계를 관통하는 여러 키워드 중 하나는 ‘역사 부정’이었다. 종래 『반일종족주의』 와 유사한 주장들은 주로 ‘역사 왜곡’으로 불려 왔다. 반면 국가 등이 저지른 국제법적으로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역사 부정’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은(물론, 이 용어는 ‘역사 부정’의 본질적인 의미와는 관련없는 사안에까지 다소 산만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역사 왜곡’이라는 용어로 담아내기론 부족할 만큼 사안이 이전보다 더욱 심각하고 중대해졌음을 시사하거나, 어떤 위기감의 반영일 수는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태가 일어난 그 해,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개최한 특강 또한 ‘역사 부정’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뉴라이트, 용산에서 교실까지” - 역사부정, 우리가 그들의 사유를 추적해야 하는 이유들’(2024.08.21.)). 여기서 대통령실을 가리키는 ‘용산’이 ‘역사 부정’의 주체로 설정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즈음, 제이슨 스탠리의 『역사를 지우다(Erasing History)』가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간명한데, 먼저 파시즘을 특정 시대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오늘날 민족이나 인종, 종교적 차이에 호소하여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파시즘이 집권하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과거사 조작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은 역사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저자가 명명한 ‘역사 지우기’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베를린의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저자의 조모가 나치 집권 후 독일에서 추방당했던 가족사,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의 연구를 저자가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불현듯 사마담과 사마천의 일화가 떠오르지 않은가).

그 책이 김한종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번역자 그 스스로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출판사의 제안에 응한 것이면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 그것이 번역자 본인의 저‧역서 및 논문들을 통해서 드러난 연구 관심이나 역정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로서도 책을 읽으며 한국의 사례가 끊임없이 떠올랐던 것은 단순히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름 아닌 김한종 교수의 번역서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본문에서도 각주를 통해 한국의 사례와 비교하며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같은 이유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수정 요구,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로까지 치달았던 경험들이 압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주변국인 일본의 정부가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하거나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소식들을 연례행사처럼 들을 수 있는 한국에서 역사교사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 특히 ‘역사를 지우’는 방법들을 그다지 새롭게 느끼지 않는 이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를 지우다』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분법적인 진영 논리가 첨예한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특정 인물이나 세력, 집단, 국가, 그리고 그들의 계보도에 따라 등장하는 존재-예를 들어 뉴라이트, 일본 등-들의 ‘역사 왜곡’ 문제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그것을 어떤 전 지구적인 현상이나 흐름으로 보기보다는 으레 ‘악한’ 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처럼 여겨지는 감이 있다. 비교 대상이 적절한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기억 전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와 같이 특정 국가‧민족의 관점을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전례 없이 비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국가‧민족적 트라우마가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그 비극성을 경합하는 기괴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에서는 주로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 인도, 폴란드 등의 사례가 제시되었다. 미국 예외주의에 심취해 있는 이들이라면 자국이 앞서 제시된 나머지 국가와 유사한 방식으로 타자화된 존재들의 역사를 조작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들 타자를 제거하고 있음을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바랄지도 모른다). 반미의식이 ‘투철한’ 이들이 보면 미국 역시 나머지 국가들과 매한가지라 여길 수 있겠으나, 미국 학자가 미국의 독자들에게 미국의 사례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다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써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또한, ‘역사를 지우’는 행위를 일련의 과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역사 왜곡’ 사안이 문제가 될 때는 주로 팩트 체크 형식으로 반론이 전개되어 왔음을 고려할 때, 그러한 ‘역사 왜곡’의 횡적 분포를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지만, 종적 흐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에서는 미국을 예로 들면, 독립 이후부터 트럼프 정부 시기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 정부의 과거사 조작을 일련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종적 흐름을 강조하는 서술 방식은 아마도 저자가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받아 수행하고 있으며, 그의 주장이 곧 아버지의 교육적 신념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개인사를 고려할 때 어떤 은유일지도 모른다.

권위주의 체제는 교육을 수단으로, 교육 대상자에 대한 정신적인 식민지화를 수반한다. 이는 민족 등을 단위로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고, 전자의 우월함과 그에 대한 후자의 위협을 강조한다. 그와 수반해, 교육에 대한 접근 제한 및 기회 박탈을 통한 반교육은 반지성주의를 추동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리고 역사교육에 대한 공격은 DEI,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에 대한 지우기를 통해 이뤄진다. 다양한 성별 및 성 정체성‧인종‧민족성의 존재를 지우거나, 이들에 대한 폭력을 지우고, 일종의 발전사관에 기초한 주류의 역할과 기여를 강조한다. 이를 통해 역사란 어떤 ‘평면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전락’하며, ‘파시스트 정치가 조작하기에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공격이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같이 상대적으로 지방 정부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앨라배마와 같은 주(州) 단위에서 성소수자 연구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예산 삭감 시도 및 이사회 교체가 일어났다. 스콜라스티사이드(scholasticide), 에듀사이드(educide) 같은 용어들은 우크라이나, 가자 지구 등에 교육시설 및 그 기반을 파괴하는 양상을 주로 가리키게 되는데, 그러한 물리적 파괴 외에 이와 같이 법에 의한 교육 파괴 행위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역사 지우기’의 행위자로서 중앙정부나 전국적인 정당 및 정치 세력 외에, 지방 정부 및 교육청 행위자에게도 주목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국제적 관점과 국내적 관점, 중앙의 관점과 지역의 관점을 종횡으로 잇고 여기에 개인사로 살을 입히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한편으론 연구자로서 참고하고 싶은 경탄할 만한 방식이기도 했다.

‘역사 지우기’에 맞서는 ‘역사 되찾기’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요약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직접 번역서를 읽어 봄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뉴라이트’나 ‘극우’ 같은 행위자들 외에, 역사교육에서의 지여 행위자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교사들은 권위주의적인 중앙 정부의 역사(교육)정책에 대해서는 강도 높으면서도 조직적‧체계적인 움직임을 앞서 여러 번 보여 주었지만, 각 지역 정부 및 각 교육청에 대해서도 그러했던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필자가 근무했던 호남 지역에서도, 흔히들 외치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각 지역 교육청이 발행한 교재에서 상당히 지역우월주의적이고 편협한 인식이 드러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박용준, 「광주 지역사 서술의 비판적 접근 및 성찰적 대안-광주광역시교육청 발행 교재를 중심으로-」 『역사교육연구』53, 2025, pp.89~142.). 물론, 그러한 지역사 인식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지역 언론의 책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중앙정부 역사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대응이 지역 정부 및 교육청의 역사정책, 지역 언론의 역사인식에 대한 그것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저자가 파시스트 정치가 조작하기 쉽다고 지적한 ‘평탄한’ 역사 인식이 존속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극우화’ 현상의 폐해가 심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런 지역 단위에서 일어나는 문제적인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된다고 하겠다.

동시에, 이러한 대응 자체를 성찰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는 권위주의 정부나 주변국의 ‘역사 부정’이나 ‘역사 왜곡’에 대해 역사교육계를 비롯한 역사학계의 비교적 강도 높은 대응이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사실 관계 및 대응 방식에 대해서도 상당한 축적이 이뤄져 왔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제껏 우리 역사학계가 이러한 ‘역사 지우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여 왔던가를 전체적인 흐름에서 회고하고 성찰하는, 즉 대응 방식 자체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이뤄져 왔는가 하고 생각하면 또 다른 물음표가 추가된다. ‘역사 지우기’의 양상과 그 대응에 대해 이번 번역서가 제시하는 지역 단위에서 전 세계까지, 저자의 가족사에서 여러 집단 정체성을 지닌 대규모 집단에 이르기까지를 넘나드는 관점과 방법이 역사학계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성찰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저자 자신마저도 부지불식간에 ‘역사를 지우’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힌트: 그 책의 155페이지를 찾아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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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전국역사교사모임 2026년 봄호 회보에 투고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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