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 는 말보다 믿지 않는다, 는 말이 더 세련된 감성처럼 여겨지는 시대에도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 쉽게 믿기지 않아도 믿고 싶고, 어떤 날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이야기가.
여기 빠뜨린 물건을 다시 사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남자가 있다. 지루할 정도로 오래 가던 장맛비가 멎은 날. 그는 ‘묘한 타이밍’에 운이 좋다는 혼잣말을 하며 낡은 빌라를 나선다. 그저 뜻 없이 지나가는 듯했던 이 말에 걸린 반전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나 밝혀진다. 바로 그 타이밍에 그가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도 꼭 그런 타이밍이 나온다. 혼자 사는 방에 줄을 걸고 목숨을 끊으려던 바로 그런 순간이. 그때 그를 찾아온 이웃으로 인해 이야기는 새로운 길을 내고 끝내 사랑이 무엇인지를, 때로는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 ‘묘한 타이밍’에 그 남자, 유즈루를 찾아온 노란 모자의 아이. 그와 그 아이의 인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감응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를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더디게 흘러가던 삶의 속도를 다시 따라잡고, 일어나 창을 열고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이 오랜 여운을 남기는 소설. 소설 속의 저 문장처럼 하나의 미스터리를 두 사람의 긴 인생 속에서 어김없이 풀어내기 위해서는 살아서, 만나고, 기억해야 한다. 이미 한 번 실패했으나, 지나간 시간을 고쳐 읽으며 다시 떼는 첫걸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비로소 “네가 있던 나날, 그 후”의 시간을 온전히 다시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