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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부정함으로써 세상에 항거하다
넬리 아르캉의 《창녀》(putain) 서평

‘창녀’라는 제목의 이 책은 묘한 거부감과 시선을 끄는 도발성을 갖추고 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명칭은 맥락에 따라 다르고 또 애매하다. 성매매 피해여성, 성판매자, 매춘여성…. 명명은 그 집단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특정한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다. ‘창녀’(putain)라는 제목은 단순하게 성매매를 비하하는 것도 아니고 섣부르게 도발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5년 동안 성매매에 종사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쓴 지은이 넬리 아르캉에 따르면, 성매매는 현실의 뒤틀리고 황폐한 성관계의 결정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가족 시나리오를 늘 상상한다. 아이를 낳은 후 늙어버린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딸과 같은 젊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창녀가 된 딸과 대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설정은 김기덕의 영화 《사마리아》를 연상시킨다. 《사마리아》의 초점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남성의 욕망과 죄책감이다. 그래서 ‘마리아’와 같은 역할을 맡은 딸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자 구원하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인물이다.

넬리 아르캉은 이 박제된 딸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는다. 딸들은 여성을 철저하게 성적으로 상품화하는 사회를 비웃고 딸과 같은 여성들을 탐하는 남성들을 까발리며,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의 몸에서 죽음을 찾는다. 이를테면 《창녀》는 김기덕 영화의 여성 판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는 극단적인 상황 설정 때문에 어떤 독자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거부감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차이로 환원 가능하다.

넬리 아르캉의 소설은 끝없이 중얼거리는 독백 같다. 좀처럼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 처한 인간의 삶에 대한 감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황폐한 상태 속에서도 무언가를 붙잡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을 연상시킨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성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여성이 성 산업에 종사하기 쉬운 사회적 환경을 냉소한다. “내가 매춘하기 쉬웠던 것은 원래부터 내가 타인들의 것이라는 점을 평소에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이미 나는 창녀로 운명지어진 거나 다름없고 실제로 창녀가 되기 전부터 창녀였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지은이의 가족 상황은 지극히 평범하다. 어린 딸을 사랑하고 세상이 악하다고 믿는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 딸을 낳은 이후 아버지의 관심에서 벗어난 어머니, 그리고 일찍 죽어버린 언니. 그녀는 가톨릭 수녀들 아래서 정갈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대학에 가면서 비로소 집에서 벗어나 바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삶에서 그녀는 여성이 어떤 성적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가를 철저하게 파악해냈다. 아버지가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과 자신은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존재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은 후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죽은 듯 산다. 그녀는 어머니의 늙은 몸 앞에서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경멸감을 느낀다. 그래서 잠자는 공주와도 같은 어머니가 차라리 어머니가 속은 채로 영원히 잠들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다움이란 끝이 없으면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고갈되고 마는 순응성이라구.” 그녀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이 꼼지락대는 걸 누가 봐주기를 기대하는 굼뱅이이자 거울만 보고 사는 스머페트 같다며 철저하게 여성집단을 비하한다. 이 같은 여성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대답으로 거식증과 성매매가 등장한다. 지은이에게 거식증은 여성이 먹기를 거부하여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나아가 그 기이한 신체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간접적으로 항거하는 방식이다. 성매매는 철저하게 도구화된 육체를 통해 ‘여성의 존재가치는 젊은 몸뚱아리’라는 숨겨진 논리를 적나라하게 현시한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도구로 끝없이 축소시키는 방식을 통해 지은이는 세상 자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죽음 근처에서 왕복하는 경험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학이 ‘죽음 쪽에서 삶에 말을 거는’ 글쓰기라고 규정한다. 《창녀》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도식화하는 방식은 《피아노 치는 여자》, 《두 연인》에서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선보인 도발적인 방식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창녀》에는 보다 묵직한 슬픔이 깃들어있다. 그 슬픔은 도망갈 곳 없는 현실을 피하고 싶은 죽음충동, 지리멸렬하고 추한 삶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압도적인 숭고함을 찾는 충동에서 나온다.

성충동과 죽음충동이 인간에게 공존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는 넬리 아르캉에 의해 보다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발전한다. 그녀에게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성충동은 그 황폐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맞닿아있다. “세상에 창녀와 그 고객을 한데 맺어준 황폐함을 잊게 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언젠가 내가 딸을 낳으면 이름을 모르간이라 지어줄 거야. 그 애 안에다 영안실(morgue, 모르그)과 신체기관(organe, 오르간)을 뒤섞어 넣는다는 의미지, 죽음의 냉기와 삶의 무게를 한꺼번에 포괄하는 이름을 부여한다고나 할까.”

지은이는 짐승처럼 왈왈 짖어대면서 자기 얼굴을 때려주길 바라는 남자 고객을 회상하면서 “그 치욕과 고통을 통해 발기하는 세상 둘도 없을 저놈의 똥개새끼”들의 더러운 속내를 만천하게 공개하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어차피 우리 모두는 몇 안 되는 표상들에 사로잡힌 존재들 아니야? 누구도 원치 않았고 전혀 상관도 없는 몇몇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서로 꼬이고 되풀이되면서 사방팔방 날뛰는 가운데 우릴 지배하는 거 아니냐구.”하며 세상을 비꼰다. 남성집단에 대한 냉소와 비난, 죽음 충동과 글쓰기에 대한 간절한 욕구,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여성집단에 대한 비하 등이 뒤섞인 이 책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긴장감과 집요함을 통해 매력적인 텍스트로 탄생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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