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타치오 2017/08/3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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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장 죽이기>는 각각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강력한 도입적 예시로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데아와 메타포는 뜻밖에도 소설 속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인공이 격은 약 아홉 달 간의 개인사를 일인칭 서술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서술하는 자아는 체험하는 자아와 때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때로는 구분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대상으로서의 삶과 경험치로서의 삶, 관념과 실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나레이션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선 ‘나’를 중심으로 한 소설의 구조를 정리해 보면,
① 여동생 고미(치)와 부모님 등의 가족관계가 중심이 된 가족사.
② 아내 유즈(柚子)와의 관계 – 표면적으로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결합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의 중심이다.
③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와 일본화의 대가인 그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 - ‘기사단장 죽이기’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④ 별장에서 지내며 알게 된 맨시키 와타루와 그에 얽힌 두 사람 아키카와 마리에와 쇼코
⑤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속 이데아의 현현
⑥ 여행 중 우연한 인연을 맺게 된 여인과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사나이
이 밖에 유부녀 여자친구 정도가 있겠다.
이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줄거리이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이 다른 줄거리를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하고 배경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알레고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내 유즈와의 사랑이 고미와 무관하지 않으며, 맨시키의 사랑은 어느 순간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과 닮아있다. 흰색 스바루 사나이는 끊임없이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하고, 쇼코 또한 고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랑과 삶과 운명 등과 같이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그러나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에 숙명처럼 얽혀있다. ‘만나도 미래가 없는 서른여섯의 남자’인 나는 물론이거니와 등장인물 대부분이 가정사가 순탄하지 못하거나 꼭 풀어야 하는 절실한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이들을 서로 얽어놓은 다음 그 틈바구니를 헤쳐나온 ‘내’가 비로소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구조로 되어있다. 구체적인 삶에서 실패한 ‘나’는 삶을 관조하기로 작정하고 여행과 낯선 곳에서의 정착을 시도한다. 우연히 발견한 그림과 신비로운 교감을 하고 삶을 관념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삶은 결국 현실이므로 관념화한 삶을 다시 극복함으로써 달라진 ‘나’를 발견하고 이전의 삶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이때의 삶은 이데아로서의 관념적 삶을 극복한 삶이므로 더 이상 이전의 삶이 아니다.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나’와 같은 또래가 되면 인생을 어느 정도 반추하게 된다. 익명성 뒤에 가려진 ‘나’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나’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익명성을 보편성으로 치환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읽어도 좋겠다.)
선불교에서는 “가는 길에 부처를 만나면 그를 죽이라”고 말한다. 영적 길을 걷는 동안 제도화된 불교의 경직된 사상과 고정된 법을 만난다면, 거기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58쪽)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관념화된 부처, 이데아로서의 부처를 깨뜨리지 않으면 부처의 본질에 이를 수 없다.
‘나’의 직업은 화가 게다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다. 초상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림은 기의로서의 대상을 기표로 화폭에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초상화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다. ‘나’는 모델을 보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파악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낸다. 관념을 현실로 옮기는 방법, 기의를 기표에 반영하는 방식이 독특하고 진지하다. 맨시키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사나이 그리고 아키카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거치며 이런 과정은 더욱 심화되고 추상화된다. 대상과 삶을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저 눈앞을 스쳐가는 그림자가 아니다.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현실의 존재다. 혹은 입체적인 육체를 지닌 스쳐가는 그림자거나.(1-328)
그것은 멘시키를 모델로 한 포트레이트였다. 아니, 포트레이트라기보다 물감덩어리를 그대로 캔버스에 갖다 바른 하나의 ‘형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풍성한 백발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순백으로 격렬히 용솟음쳤다. 언뜻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지녀야 할 요소는 모두 색의 덩어리 너머에 감춰져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멘시키라는 인간이 실재한다.(1-333)
한밤중 방울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구덩이는 현실과 판타지를 이어주는 곳이다. 현현한 기사단장 이데아는 스스로를 각성에 가까운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자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드러나지만, 이데아는 타인에게 인식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아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구덩이 속에서 나 자신도 이데아가 되어가는 체험을 하면서, ‘나’는 관념에 대한 각성이 현실에 반영되는 과정을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경험한다.
성경은 왜 바벨탑을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을까. 바벨탑을 쌓으면 정말 신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일까. 신은 자신을 복제해서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없다. 인간에게 신은 경배의 대상이자 해결해야할 대상이기도 했다. 신을 닮은 인간이지만 신을 복제한 인간이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은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다. 복제함으로써 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각성은 정교한 복제로 해결될 수 없다. 관념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삶을 지배하는 섭리를 이해할 도리가 없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의 도움으로 초상화 그리기를 통해 복제에 각성을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 이데아를 찔러 죽이고 나의 길을 찾아간다. ‘내’가 삶에서 다시 얻은 것은 일상성의 회복이지만 ‘나’는 익명성으로 가려진 ‘누구나’이다. 그 ‘누구나’는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다시 되찾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루키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표절시비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키의 문체는 유럽문학과는 다른 감성을 드러낸다. 이미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에서 하루키는 스스로 자신의 문체는 일어를 영어로 옮긴 다음 그것을 다시 일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이런 문장의 양식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정서가 울림이 있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기억나는 장면,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표현들이 우리 의식 속에 파고들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떤 묘사를 할 때 자연스럽게 그 정서가 불려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루키 냄새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를테면 다음의 문장들이다.
주위 산허리에는 도막난 구름이 낮게 걸렸다. 바람이 불면 구름 자투리가 과거에서 길을 잃고 들어와 옛 기억을 찾아 헤매는 넋처럼 산줄기를 흐물흐물 떠돌았다. 가랑눈 같은 새하얀 빗줄기가 소리 없이 바람에 나부끼기도 했다.(1-13)
집은 산머리에 있어서 남서향 테라스로 나오면 잡목림 사이로 바다가 살짝 엿보였다. 대야에 받은 세숫물 정도의 바다. 광대한 태평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다. 멀리서 보면 그 바다는 칙칙한 납덩어리 같기만 했다.(1-14)
당시 나와 아내는 일단 결혼생활의 끝은 본 상태였고 이혼서류에 정식으로 도장도 찍었지만,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다시 합치게 되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당사자인 나조차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그 경위를 굳이 요약하자면 ‘원상 복귀’라는 흔해빠진 표현에 다다를 것이다. 그 두 번의 결혼생활(전기와 후기라고 해두자) 사이에는 약 아홉 달이라는 시간이 험준한 지협에 뚫린 운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1-15)
반면 무언가 매끄럽지 못한 느낌을 주거나 연결이 어색한 대목도 더러 보인다.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이런 부분은 소설에 몰입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긴 얼굴의 손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기로 했다. 꽤 단단히 묶은 탓에 푸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리 나쁜 남자 같지 않았다. 아키가와 마리에가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몇 가지 정보를 기꺼이 알려주지 않았는가. 손발을 자유롭게 해주어도 나를 방해하거나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대로 묶어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가는 이야기가 한층 성가셔진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끈자국이 남은 손목을 조그만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러고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혹이 부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2-375)
마리에의 가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듯한 묘사나 필요이상의 성적 장면에 불편해 하는 독자도 있으며 이 부분은 다른 그의 작품과 연관해서 이야기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현실인지 환상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묘사들이 작품으로부터 독자를 소외시킨다거나 황당한 느낌을 준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충분히 논의 될 여지가 있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나 카프카의 <변신>, 김영하의 <흡혈귀>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런 소설적 가설을 전제하지 않으면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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