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100년 : 혁명기, 건설기, 발전기, 신시대
오늘 소개할 책은 책과함께에서 출판한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1921~2021>이다. 중국과 중국공산당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뷰티기업인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 브랜드를 중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 책은 성숙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아모레퍼시픽은 AP포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를 축으로 국내 분야별 중국 전문가 교수님들이 본인의 연구분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각각 교수님의 연구주제를 개별적으로 확인해보니, 오랜 시간 중국을 연구하고 학문적 교류 일환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신 거로 판단된다.
각 논문은 학계 검증도 받았다고 하니, 민감한 중국 주제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길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2016년 중국 위안화에 대한 국제 금융자본의 공매도 공격, 2018년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무역 전쟁, 2019년의 코로나 책임론까지 국제 여론은 급격하게 중국공산당에 호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때 중국공산당이 나아갈 길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조언을 전해줄 공저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록 순)
이희옥 성균관대학교
안치영 인천대학교
하남석 서울시립대학교
서봉교 동덕여자대학교
장영석 성공회대학교
강수정 조선대학교
장윤미 동서대학교
임춘성 목포대학교
김미란 성공회대학교
백승욱 중앙대학교
이글 일부는 집필진 외 역사 블로거 히스토리님, 경제 미 가드너웹대학교 김성재 교수님의 글에서 참고했음을 알립니다.
중국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주제는 중국공산당의 4기에 맞춰 정치, 경제, 조직, 외교, 문화, 젠더 등 다양한 관점에서 공산당을 조망할 수 있다. 마치 영화 <메멘토>처럼 이전에 벌어진 사건을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해 정보가 중첩되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느낌이다.
1. 혁명기 : 1921년 ~ 1949년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50여 명의 당원, 13명의 대표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은 현재 9100만 명 이상의 당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정당이 되었고, 2021년 창당 100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맞았다.
중국공산당이 창단한 1차 공산당 대회장이 있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창당한 순간 참가인은 옆방의 살인 사건으로 혼비백산 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은 창립한 천두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일본,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다. 1915년 잡지 <신청년>을 창간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 주의를 좇았다.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고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천두슈가 활약하는 계기는 1919년 5월 4일 운동이 기폭제인데, 이는 1차대전 승리 후 일본이 중국에 요구한 ‘21개조 요구’를 사건이 관련 있다. (독일 조차지 승계, 여순,대련, 남만주철도 조차 기한 99년 연장, 일본인 정치, 재정, 군사고문 초빙, 특정 지역의 중일 공동경찰...)
중국 국내에 ‘21개조 요구’가 공표되자 중국을 ‘제2의 조선’으로 만드는 식민지화의 기도라 생각해 반대운동이 고조된다.
1915년 대총통 원세개에 강요했으나 1916년 원세개는 급사한다.
1919년 5월 4일 신문화운동의 결과 대중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쑨중산은 1919년 ‘중화혁명당(중국국민당)’을 창설했다.
천두슈는 <청년잡지>, <신청년> 창간하고, 구도덕, 구문화를 비판하는 신문화운동을 일으킨다.
그가 발굴한 신청년에는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가 있고, 김일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1927년 장제스의 4월 12일 장제스의 시안 사변 이후 7월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어 총서기를 사퇴한다.
중국공산당이 혁명기 역사를 다시 쓰려는 이유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장제스의 국민당이었고, 공산당은 소비에트, 국민당의 하부 조직처럼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1922년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마링은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국공합작을 제안했다. 쑨중산도 소련의 도움으로 국민당을 키우고자 했고, 국공합작이 추진되었다. (1차 국공합작)
국공합작의 결과,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1921년 100명도 되지 않던 당원 수는 1924년에 500명이 되지 않았으나, 1925년 말이 되면 2만 명으로 증가했고, 1927년 초에는 5만 8,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은 1927년 4월 12일 새벽 국민당이 상해를 점령하고 국민당의 지시를 받은 청방과 국민당의 비밀조직들이 국민당의 정규군과 함께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 지도부를 공격하면서 파탄 나고 말았다. (시안 사변)
백색공포 속에서 잔존한 중국공산당 다원 수는 1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1927년 10월 마오쩌둥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의 경계에 있는 징강산으로 들어가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대의 공격으로 근거지를 포기하고 1935년 10월을 산시성 북부로 들어갔다. 1934년 장시성을 떠난 1934년 장시성을 떠난 8만 명이 남자와 35명의 여자는 산시성 북부에 도착했을 때 1만 명이 채 안 되었다.
1936년 말 중국공산당 홍군이 점령하여 행정수도가 된 옌안은 인구 1만 명 정도의 가난한 도시였다. 이때 일부 부대는 도보행군으로 1만 킬로미터에서 1만 2,500킬로미터를 이동했고 이를 ‘대장정’이라 하고, 중국공산당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이다.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겪었던 일을 잘 소개한다.
국민당의 제2차 북벌은 1928년 완료되었다. 국민당은 형식적으로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공산당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침략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현실화하자, 국민당 내부에서는 공산당과의 전투보다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가 더 중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한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이 발발한다.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세를 시안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제안한다. (2차 국공합작)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장제스와 국민당의 일부 세력은 타이완으로 이주했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책의 표지 장면은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발표 당시 모습이다.
2. 건설기 : 1949년 ~ 1978년
건설기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은 소련에게 뤼순, 다롄 항국의 이용권을 회수하고 한반도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스탈린이 제안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으로 미소 우주 경쟁에서 소련이 앞서간다. 중국은 “소련은 미국을 추월하고 중국은 영국을 추월한다”라는 구호로 빠른 발전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이 대약진운동이다.
1957년 반우파투쟁를 거쳐 1958년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낙후한 면모를 바꾸고 이른 시일 안에 공산주의를 달성하고자 한다.
대약진운동은 안타깝게도 엉뚱한 사건으로 시작돼 완전히 실패하고 수천만 명의 비정상적인 사망자를 초래하고 끝난다.
공산당 지도부는 대약진운동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갈등이 심해져 지도부의 균열이 심화하였다. 마오를 지지하는 ‘마오파’, 류사오치를 지지하는 ‘주자파’, 둘다 아닌 ‘소요파’로 나뉘었다. 마오쩌둥은 지도부와의 균열과 수정주의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방지 및 당과 국가기관의 관료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마오쩌둥을 제외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비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조가 등장했다.
하지만 홍위병을 필두로 극단적인 전통 파괴와 계급투쟁을 통하여 문화와 교육 및 사회적 재산이 파괴되고 전방위적인 피해자를 양산했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는 펑더화이의 측근이었고, 이때 펑더화이와 함께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목숨을 같이했던 동료이자 동향 후배인 펑더화이를 실각시켰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밀어냈다.
문화대혁명 마지막은 저우언라이가 주자파라는 4인방의 비난으로 시작되었다. 어쩌면 마오보다 더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저우언라이에 대한 모독은 중국인을 분노하게했고, 텐안문 광장에서 추모하는 화환을 바쳤다.
다른 유명 지도자 주더도 1976년 7월 사망하고, 7월 허베이성 인구 100만의 도시 탕산에서 시작된 지진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탕산 대지진)
1976년 9월 9일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문혁의 시작과 더불어 옌안 시기부터 유지되어오던 2인자로서의 류사오치의 지위는 린뱌오로 대체된다.
린뱌오는 1969년 제9차 당대회에서 당장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명기된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쿠데타 시도의 실패 이후 망명하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몽골에서 사망한 것으로 주장되는 린뱌오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후계자로 왕홍원, 덩샤오핑, 화궈펑을 차례로 지정한다.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 후 그가 지명한 마지막 후계자인 화궈펑은 화이런탕 사변이라고 불리는 궁정쿠데타를 통하여 문혁 주도세력인 4인방을 체포함으로써 승계를 완료하고 화궈펑 체제를 형성하는 동시에 문혁이 종결된다.
3. 발전기 : 1978년 ~ 2012년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이 체포되면서 중국공산당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목표로 ‘대내적 개방’과 ‘대외적 개방’을 시작했다.
베트남전쟁 (1960~1976) 중에 싹튼 냉전기 국제질서의 재편은 중국에게 다른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1971년 베트남과 인도를 거쳐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는 ‘중국이 변하기 전에는 세상이 안전할 수 없다’라고 인식하고, 1972년 닉슨 대통령은 미수교 국가인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하고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중 데탕트(긴장완화)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동서 화해를 목표로 했지만,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국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도 문혁의 혼란이 끝나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79년 미·중 수교를 계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한 중국은 우리가 잘하는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간다.
한가지 주목한 사건은 1989년 6월의 텐안문 사건이다. 덩샤오핑의 권력을 잡아 ‘개혁’과 ‘개방’을 외치면서 경제 발전에 힘을 쏟았다. 자본주의 체제를 배우기 위해 인재를 뽑아 서유럽에 견학을 보냈지만, 이들은 중국의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1989년 5월 중국 경제의 발전만큼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학생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했다. 공산당과 정부는 계얼령을 선포해 광장의 국민을 해산시켰다.
그러던 6월 3일 군대가 동원되어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 당시 광장에 있던 학생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던 사건 텐안문 사건이다.
4. 신시대 : 2012년 ~ 2021년
미·중 전쟁에 대한 해답은 내수 시장의 확대였다.
2020년 5월 제시돈 ‘국내·국제쌍순환’정책은 기존의 경제정책과 완전히 상반된다.
이번 빅테크 기업의 해외 상장을 막는 이유중 하나도 중국의 정보 유출을 꺼리는 것도 있지만, 중국의 내수 사장만으로 기업 운영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중국 사회보장시스템의 완성을 적극 지원한 위챗의 텐센트의 기술력과 공산당의 지도력으로 전 국민을 실시간으로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중국 정부의 기술을 놀라우면서 두렵기도 하다.
왜 그렇게 국민은 안정적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중국은 역사적으로 혁명에 대단히 민감하다. 국민의 동요는 가능한 빨리 알아내어야 안정적인 정권 유지가 가능하다.
국공내전 당시에도 전세가 확연히 불리한 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길 수 있었던 주효한 전략 중 하나는 스파이를 이용한 정보 습득이다. 물론 국민 다수를 이루는 농민의 지지가 가장 주효했다.
2012년 시진핑 주석의 집권 이래 그는 갈수록 마오쩌둥의 행적을 연상하게 한다. 중화민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의 독재 정치의 폐단을 잘 알았던 등샤오핑은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해 정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번 기념식 연설에서 차기 지도자는 시진핑이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의 아이돌은 창당 100주년 기념식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 국민은 시진핑의 장기 집권에 대해 장기 독재를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차이가 있다.
중국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이 앞으로 어떤 정치를 펼치고 중국을 이끌어갈지 궁금하다.
책에는 다음의 주제로 위에서 소개한 4기에 관해 다양한 분석을 추가한다.
프롤로그 〈중국공산당 100년: 이해의 확장을 위해〉
제1장 〈중국공산당 100년: 혁명에서 신시대까지〉
제2장 〈이론적 논쟁과 노선 투쟁〉
제3장 〈사회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제4장 〈사회동원과 조직화〉
제5장 〈대외인식과 외교정책 노선〉
제6장 〈노동자 조직의 역사와 변화〉
제7장 〈문예정책과 근현대문학〉
제8장 〈혁명과 젠더〉
에필로그 〈‘신시대’ 중국의 역사 다시 쓰기〉
중국에 관한 놀란 기억은 몇 년 전 새해를 맞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 주석에게 참배하려는 중국인의 긴 행렬을 보았을 때이다. 하노이의 호치민 묘소에 참배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와 사뭇 다른 비장함이 얼굴에 깃들어 있었고, 수백 미터를 줄 서서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을 마오쩌둥 주석이 신과 같은 인물로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여행을 통해 중국에 관해 궁금했던 점은 중국인에게 마오쩌둥 주석과 중국공산당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토지소유권이 없이 사용권을 가지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경제를 발전하게 했는가?
남성과 여성의 가정 내 직장 내 남녀 역할이 한·중·일이 너무도 다른 모습에 놀랐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하나씩 궁금증에 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후발 주자인 소련과 일본의 GDP 수준이 미국의 40%~50%에 이르렀을 때, 경제 정책을 통해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했다. 중국의 성장은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되었고, 중국 경제가 미국의 GDP 기준 50%를 넘어 세계 2위로 올라서는 2010년 당시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21년 GDP 기준으로 미국 22.6조 달러, 중국 16.6조 달러를 나타낸다. 한국도 1.8조 달러로 2005년 이후 13년 만에 10위 이내로 진입했다.
중국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진 시진핑 주석은 창당 100주년 경축대회에 모습을 드러내 “어떤 외국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압박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누가 그런 망상을 하면 14억 중국인의 피와 살로 만든 강철 만리장성 앞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개혁개방 이래 중국 최고지도자가 공개 석상에서 외세를 겨냥해 내놓은 가장 강력한 경고장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미국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워딩을 사용한 적은 처음이다. 미국을 향해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는 시진핑 주석의 자신감으로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중국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1921-2021> 시진핑 주석과 중국공산당의 과거, 현재, 미래를 분석하는 좋은 책입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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