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주 얼렁뚱땅 영어 스터디를 하고 있다. 실은 스터디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실패해도 아까울 게 없는 챌린지에 가깝다.
주3회 이상 페파피그 영상을 보고 인증하는 건데, 화면을 찍어서 올려도 되고 새로 익힌 표현을 받아 적고 그 공책을 찍어 올려도 된다.
영어와는 담을 쌓은지 오래고 토익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까마득하니, 다들 영어를 ‘공부’하는 행위가 어색하지만 재밌게 하고 있다. 요는 그거다. ‘재미’.
인생에서 영어 학습자로 산 기간을 헤아려보면 그때 태어난 애가 대학에 가고도 남았는데 영어와 아직도 서먹하다.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중략)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
35p
제2언어를 배우는 적기에 대해서는 조금 의견이 갈리지만, 공통적으로 성인은 배우기 힘들다고 말한다. 뇌가 굳고 혀가 굳고, 아무튼 다 굳어서 그렇다는데 책은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자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페파피그 스터디가 즐거운 이유는 영상 내용이 쉬운 것도 있지만, 정말 쉬운 표현들을 가지고 ‘나 이런 것도 몰랐어~’라는 태도로 부끄러워 하지 않고 깔깔 웃어넘길 수 있는 친구들이 함께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거치고 지금은 일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독특한 경력은 저자가 언어와 제2언어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했다.
제2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원어민과 똑같이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그 언어와 문화를 직접 바라보기 위함이다. 나다운 고유함이 가장 소중하다.
80p
발음을 잘하는 것, 뉴스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여행지에 가서 길을 물어볼 수 있는 것 등 제2언어를 잘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언어를 습득하는 이유가 나의 시선으로 언어와 문화를 ‘직접’ 바라보기 위해서라는 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영어는 제1언어로 구사하는 사람보다 제2언어로 구사하는 사람이 더 많은 언어’인 만큼 그 안에 담긴 문화를 영미권에 한정지어 설명할 수 없다. 저자는 영어를 배우는 일을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나왔던 자아를 무너뜨려야 제2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이 다시 떠오르는 지점이었다.
분명 제목에 적은 오타쿠 외국어에 찔린 분들이 있겠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소위 ‘덕질’을 하며 배운 외국어를 말하는데,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과는 동떨어져 있어 생활하며 쓰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들이다. 예컨대 중국의 고장극을 보며 외우게 되는 ‘꾸이씨아(꿇어라)’, ‘삐줴이(닥치거라)’, ‘황샹(황제폐하)’ 등이 그렇다. 분명히 외국어인데, 외국인을 만나 쓸 일이 없다.
야자시간에 공부하기 싫을 때면 당시 좋아했던 가수 보아의 일본어 가사를 받아적거나 일본어로 쓰인 가사를 해석하며 시간을 떼우곤 했는데, 그때 익힌 단어들은 거의 연애편지에나 쓸 수 있는 말들이었다. ‘사랑의 증표’, ‘세상의 지도’, ‘우리가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 같은 말들이었으니…. (이마짚)
그리고 성인이 되어 만난 나루토의 일본어! ^^! ‘술법’이라는 단어를 외워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저자가 책에서 말하듯이 나 역시 초급 수준에서는 여행지에서 조금 말을 하는 정도, 고급 단계가 되어야 비즈니스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초급-중급-고급 단계를 거쳐 미국으로 간 한국 유학생들은 수업 발표나 연구 토론은 쉽게 하는데 오히려 사교 모임에서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건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이나 문화적 지식의 부족 때문이다.
언어 능력은 아래에서 위로 쭉 그어나가는 수직선이 아니다. 옆으로 계속 덧붙여 확장해 나가는 퍼즐 맞추기에 가깝다. 처음 조각을 맞추기 시작할 때는 막막하지만, 어느 정도 맞춰놓으면 다음에 어떤 조각을 끼워야 할지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90p
‘오타쿠 외국어’는 엘사 얼굴만 멋지게 완성해 놓은 겨울왕국 퍼즐에 가깝다. 좋아하는 부분만 완성도 높게 만들어둔 후에 다른 부분은 일단 비워놓은 단계. 이렇게 한 부분을 완성해 두면 다른 능력을 짜 맞춰 나가기도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91p
최근에는 언어 지식은 오히려 부차적이고, 대화 상대자와 함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유연한 태도 및 주변의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의사소통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제1언어를 공유하는 한국인 사이에서도 “나 때는 말이야~”를 설파하는 사람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 언어 지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상대와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102p
그럼에도 계속 제2언어 앞에서 움츠러드는 나에게 저자는 ‘지식’보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의사소통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것도 나이고, 어느 날 운이 좋아 유창하게 말하는 것도 나이다. 내 말의 하찮음을 견디는 만큼 내 말그릇이 넓어진다.
136p
실질적인 지식서는 아니지만 제2언어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다시 세우게 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의욕을 고취 시키는 책인 것 같다. 내 말의 하찮음을 견디는 만큼, 이라는 문장이 크게 와닿았다. 오늘은 페파피그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최사라가 될 것이다!!!
제2언어 학습에 좌절하고 또 다시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마음을 다잡을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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