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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dde님의 서재
  •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 강지희 외
  • 12,600원 (10%700)
  • 2022-02-14
  • : 634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다양한 직업의 10명의 사람이 함께 글을 썼는데, 그중 <경찰관속으로>와 <아무튼 언니>를 쓴 원도 작가님도 있다.


혼밥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부터 혼자 먹는 밥을 즐겼다. 아는 분은 이런 나를 두고 1인 가구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맞다. 1인 가구에 최적화된 사람, 삶.​


매일 뭔가를 먹어야만 하루가 건너가니까, 누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 지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혼자 먹는 점심에서 출발한 열 개의 삶에서 나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읽으면 내 얘기가 쏟아지는 글들이 있는데, 이 산문들이 내겐 그랬다.



나는 오늘도 점심을 먹었고 내일도 먹을 것이며 모레도 먹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먹어야만 하는 밥은 싫다. 진정으로 마음이 동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삐 놀리고 싶다. 식사가 즐거워지고 음식을 감사히 여겼으면 좋겠다. 끼니를 때우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포만감을 진심으로 만끽했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 모두가.


191-192p


한때 금요일 저녁은 늘 치킨까스였다. 매일이 야근이었지만 새벽 1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던 금요일은 유일하게 회사에서 저녁을 사주는 날이었다. 치킨과 맥주를 파는 허름한 호프집에서는 돈까스와 치킨까스를 팔았다. 가끔 대표님의 의견을 따라 순댓국을 먹기도 했다. (이때 살면서 처음으로 순댓국을 먹어봤다. 물에 잠긴 순대라니...) 소주나 맥주를 곁들이고도 누구하나 붉어지지 않은 얼굴로 사무실로 돌아가 마감을 끝냈다.



점심과 저녁은 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열두 시가 넘으면, 일곱 시가 넘으면 대충 밥을 먹으러 갔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데까지 삼십분이 채 안 걸렸다. 몸이 빠르게 망가졌다. 이렇게 살면 마흔에 죽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관두었지만 옮긴 직장도 야근이 잦긴 마찬가지였다. 사먹는 밥은 소화되지 않고 위장에 쌓였고 자주 체했다. 체기는 사나흘씩 이어졌고 날이 추워지면 체기에 몸살이 겹쳐 링거를 맞으러 가기도 했다. 링거를 맞고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서 기운이 빠졌다. 그 와중에 8년을 같이 살던 새가 죽었고 많이 울었다. 사실 그 무렵의 기억이 별로 없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만 남았다.



몸이 아픈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집을 쓸고 닦고, 매일 끼니를 차리면서 다음 일터를 어렴풋이 상상했다. 음식을 연료로 쓰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삶. 食事는 단어 그대로 ‘먹는 일’이다. 일과 일 사이에 끼어있는 윤활제가 아니라. 나는 먹는 일이 하나의 행위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이 살고 싶었고, 채식을 시작하면서 먹는다는 행위는 행위 그 이상이 되었다. 직접 챙겨먹는 게 귀찮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먹는 일엔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 이 귀찮음이 얼마나 호사스러운지도 깨닫게 된다.



매일 비슷한 푸성귀에 버섯 반찬이라도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볼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이는 투명함이 좋다. 이 호사가 사는 동안 계속 이어지기를.






수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호박이 5000원을 찍은 그날 본 뉴스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범람한 강물 위에 비죽이 튀어나온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은 그 모습만으로 문명이란 단어에 조소를 보냈다. 내가 야채값과 외출할 때 젖는 신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있었다.


71p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내 거처는 더 작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큰 집에 살고 싶은 욕망과 안분지족해야한다는 가치관이 충돌할 때 모서리에 놓인 냉장고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뒹굴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온 레몬과 아무튼 한국 출신은 아닌 아보카도 같은.



코로나19인지 코비드19인지 우한코로나인지 이름도 불분명하던 2020년 초입에는 외출을 최소화했다. 하루 확진자가 50명도 나오지 않던 때였다. 작은 방에 앉아 죽기 위해 태어난 동물을 거처를 생각했다. 삶의 터전은커녕, 삶도 터전도 없는 어떤 생.



내가 채소가게에서 푸성귀 값을 보면 투덜거릴 때, 맞은편 정육점에는 피부가 벗겨진 채 반으로 잘린 소나 돼지의 몸이 걸려있다. 가끔은 눈알이 없는 머리가 놓여있기도 하다. 나는 그것의 맛을 잘 알고 있다는 게 마음이 무거워서 가끔은 부러 빤히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아예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마주하거나 모른 척 하거나 어느 쪽도 쉽지는 않다.




모두가 경계를 잃어버리는 비행기라는 공간은 그래서 어딘가 뭉클한 구석이 있다. 불이 모두 꺼졌을 때 특히 그렇다. 피부색이나 표정이나 다른 정보 없이 앞에 놓인 화면만이 우리를 대변한다. 그런 광경은 좀 공평하지 않나. 서로를 모르고도 괜찮을 때. 누구도 구분 짓지 않아도 될 때 왜인지 조금 안도한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우리는 가끔 원하지 않나.


213-214p


‘경계를 잃어버리는 공간’이라는 말이 좋다. 점심은 내게 경계를 잃어버리기 좋은 시간이다. 회사라는 공적인 시간과 시간 사이에 적당히 일탈을 누리는 시간.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으로, 누가 봐도 백수청년인 듯 동네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돌아오는 시간. 비행기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도 괜찮지만, 개를 데리고 있을 때도 그렇다. 나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건네고, 다른 사람들도 개를 데리고 있는 내게 쉽게 말을 건넨다. 사람은 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간. 점심시간에 개와의 산책은 그야말로 훌륭한 디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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