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가 작품이 될 때>의 박보나 작가의 미술 에세이.
읽지는 않았지만 전작이 워낙 유명해서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이 퍽 궁금했다.
미술 에세이가 생소하기는 한데, 기억에 남는 그림 에세이가 있다. 우지현 작가의 <나를 위로하는 그림>인데, 그림을 하나 소개하고 그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반면, 박보나 작가는 생존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을 덧붙여 소개한다.
책 디자인은 이기준 디자이너가 맡았다. 예전에 친구와 서점에서 민음사 쏜살 문고 시리즈를 보고 마음에 드는 표지를 쭉 꺼내 디자이너를 확인해봤더니 전부 이기준 디자이너가 작업이라 그 뒤로 이름이 각인돼서 볼 때마다 반갑다. (이번 디자인도 취향 저격... 서체 뭘까, 궁금해...)
얇은 책이라 목욕하며 읽기 좋을 것 같아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들어가 읽었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금세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내용이 하나의 키워드로 묶이고, 한 장의 내용 말미에 나오는 키워드가 다음 장의 시작 키워드가 된다.
그렇게 쭉 돌아서 다시 시작할 때 나왔던 '나무' 키워드로 돌아오는 구조.
구조도 너무 흥미롭고 흥미로운 구조를 원형 목차로 디자인한 것도 너무 좋았다.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은 너무 많았지만, 내가 새로운 한해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으로 삼을 문장들을 소개해 본다.
작은 생명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때, 주변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한껏 당겨 읽어본다. 다른 생명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은 파괴와 멸망의 나락 반대편에 선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외로울 리 없다.
33-34p 새의 소리를 이어간다면
거대한 포춘쿠키 더미는 당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작업에 쓰인 포춘쿠키는 중국 이주민을 상징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중국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이 과자는 정작 중국에는 없다. 쿠키를 처음 만든 사람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일본인 사업가였다. 하찮게 부숴 맥락 없는 운세를 읽고 잊어버리고 마는 포춘쿠키는, 미국의 중국 이민자들처럼 미국에만 있다.
38p 상상의 맹수 호랑이를 키우고 있지 않은지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대한민국에 사는 외국인의 수는 133만 명이고, 그중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는 공식적으로만 84만 명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만드는 혼종 문화와 변화하는 정체성은 이미, 지금, 여기의 실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이와 낯섦을 구실로 이방인들을 여전히 멀리 밀어내곤 한다. (중략) 폭력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끔찍하지만, 혐오의 언어들이 그저 가볍게 받아들여지고 일상적으로 자리 잡아간다는 사실은 더 소름끼친다. 오해와 증오는 가짜 맹수를 살찌운다.
43p 상상의 맹수 호랑이를 키우고 있지 않은지
현대인은 동물을 가공되고 포장된 선홍색의 식자재로 슈퍼마켓에서나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애완동물'로 선택된 동물들은 동물성을 철저히 제거당하고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훈련받으며 인간화된다. 동물보호구역이나 동물원의 동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의 감시와 통제 아래, 동물들은 무대 위의 구경거리로 무기력하게 존재할 뿐이다.
90-91p 원숭이의 눈에 신성(神聖)이
나는 당신이 사는 집의 브랜드와 가격이 궁금하지 않다. 나는 당신이 같이 사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고, 외로운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부동산을 팔아 얼마의 시세차익을 남겼는지가 아니라, 무엇에 따뜻함과 위로를 느끼는지 알고 싶다. 당신의 공간을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과 추억들로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134-135p 도시와 아파트에도 사람이
사람이 따뜻함과 위로를 느끼는 지점을 아는 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지점들은 내가 무기력해지거나 바닥이라고 생각될 때 다시 기력을 찾을 때까지 버티는 힘이 되어주고, 또 내가 버틸 수 있어야 타인의 괴로운 시간을 함께 견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고 소소한 수다를 떨 때 따뜻함과 위안을 느끼고, 그 온기로 일주일, 한 달, 수 개월을 사는 것 같다. 그동안은 빵빵했는데 코로나로 곳간이 빵꾸나서 요즘 열심히 메우다가 다시 위드코로나 끝나서 빠른 속도로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 부스터샷 맞기 전에 만나지 말자고 해서 생일에도 친구들을 못 만났다. (왈칵) 애두라, 나 몰래 질병관리청으로 직장을 옮긴거니? 크리스마스에 겨우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존버해야 한다. 슬퍼... 저에게 사교와 우정을 허락해주세요. 몹쓸 전염병아...
'지구별의 다른 미래를 그려본다'는 작가의 말처럼 살생, 도시의 삶, 불안 조장하는 사회, 장애 차별 등 다양한 주제를 키워드 하나에서 시작해 이야기로 확산해가는 구조가 좋았다.
각 챕터가 길지 않고 비관도 낙관도 아니지만 희망을 담고 있는 점도 좋고.
상반기에 읽은 책이 뭐가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2021 하반기의 책으로 꼽았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