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예술의 전당 알폰스 무하 전시에 다녀왔다. 처음 봤을 때 무하의 그림이 타로 카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로보다 세로가 긴 프레임에 어딘가 온화한 얼굴의 여성, 그리고 사방에 화려한 장식이 더해지면 딱 타로 카드가 아닌가.
게다가 무하의 그림은 한때 카드캡터 체리 세계관에 진심이었던 나를 홀리고 말았다.
당연함. 카드캡터 체리도 타로카드도 전부 무하의 그림을 오마주한 거임.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겠지만, '무하 스타일'을 탄생시킬만큼 돌풍을 일으켰던 그의 그림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2013년 한국 전시가 아시아 최초 무하 전시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후에 종종 무하의 전시가 열리는 걸 보면 무하의 그림은 꾸준히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요즘 하도 방법서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라는 제목에서 이 책도 무하의 성공 가도에 어떤 비법이 있었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게 알폰스 무하 첫 전시는 그림은 예쁜데 어딘가 심심한 작가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하가 삽화 위주로 작업했다는 걸 몰라서 그림 속의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과 풍경이나 여백 없이 인물로 꽉 들어찬 그림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14~15세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궁정 미술가인 줄), 19~20세기를 살다 갔고 무하의 아들이 1991년까지 살았으니 거의 현대 미술가가 아닌가? (아님)
미술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 20세기 작가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이나 전쟁의 공포를 그림에 반복되는 이미지로 녹여냈다. 멀리서 보더라도 어둠과 우울의 기운이 팍팍 뿜어져 나오도록.
무하의 그림 중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가 평탄하고 부유한 삶을 살았을 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광고 삽화인데 어둡고 우울해 보이면 큰일이겠지...)
이 책은 마치 위인 전기처럼 무하의 생을 처음부터 쭉 따라가며 내 편견을 깨뜨렸다.
특히 청년 무하의 삶이 굉장히 와닿았다.
어쩐지 짠한 청년 무하
가족이 음식 꾸러미를 보내줄 때도 있었지만 두 청년은 거리 공연으로 생계를 이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무일푼의 삶을 살아가는 무하가 브르노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몹시 화가 났다.
아저씨 나중에 그 아들 떼돈 버니까 그냥 두세요...
무하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 반복되는 업무, 법원 사건을 처리하는 서류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경력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해.
무하 고민 = 내 고민 = 이 시대 청년들 고민
무하가 공무원 일에 만족했다면
저의 카드캡터 체리X지수와 도진X청명 그리고 샤오랑은 없었겠지요.
이미 퇴사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별세했지만 그래도
무하의 퇴사를 응원해!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과 음악에 두각을 보였는데,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탈락한다.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것과
내 재능을 발휘하며 사는 건 전혀 상관이 없다는 행간을 읽어보고.
무대 화가 일을 하며 이제 조금 돈을 보나 싶었는데 또 다시 사건 발생
1881년 12월 빈의 링 시어터에서 일어난 참혹한 화재로 5백 명이 사망하고 극장은 폐허가 되었다. 회사는 직원의 수를 줄여야 했고, 가장 젊은 나이였던 무하가 제일 먼저 해고되었다.
어리면 돈을 안 벌어도 되나요...!
무하는 재능을 알아본 이들에게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후원도 넘나리 순탄치 않았던 거임
망한 후원썰1
처음에는 부유한 후견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후원이 끊어지자 렌틸콩 몇 알만으로 버티면서 매서운 추위와 허름한 숙소를 감내해야 했다.
망한 후원썰 2
1889년 1월 무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백작은 무하에게 매달 2백 프랑의 후원금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너그러운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집을 얻고 일주일의 엿새를 미술 공부에 전념하던 무하는 이 가혹하기만 한 환경의 변화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두번째 후원자는 무하가 그림은 안 그리고 공부만 하니까
당근보다 채찍을 주는 마음으로 후원을 끊은 것 같다.
알고보니 일잘러
파리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으로 무하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 수요를 맞추기 위해 조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무하는 '진지한' 화가로 거듭나기 위해 1906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무하는 연극계에서 초상화 의뢰를 받길 희망했고, 유명한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자 하는 부유한 고객을 찾으려 했다. 그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삽화가로 너무 널리 알려진 나머지 순수미술을 할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무하의 그림이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그가 그린 극장 포스터는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전부 떼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포스터를 대체 왜 떼어갔을까 싶다가도
요즘 매장에 놓인 유명인 등신대나 포스터를 가져가는 것처럼
무하의 포스터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귀엽다.
(그거 잘 보관했다가 물려주면 거의 코인 급일텐데...)
무하의 능력 중에 가장 부러운 능력
자신의 디자인을 의뢰인의 요구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현대 사회인은 이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러요...
무하의 민족 정체성
무하는 체코에서 태어나 7살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을 보고 자랐다. 프랑스로 가서 성공했지만 유년기에 보고 겪은 전쟁의 이미지가 평생 남아 있었고 그는 자신이 슬라브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듯 하다.
나는 내 작품이 상류층 인사들의 응접실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화관과 그림이 있는 전설적 장면이 가득한 책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동포들의 것을 사악하게 도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면서 내 생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오직 내 나라를 위한 작품을 만들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다짐이 바로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다. 프랑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무하는 체코인보다 프랑스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작품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939년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 무하는 프라하에 살며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 때문에 심문을 받았고, 쇠약해진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무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른다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을 것 같은 무하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여느 삶과 마찬가지로 굴곡이 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번갈아 찾아오지만 크게 꺾이거나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갔다는 게 존경스럽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무하라면 전쟁이나 세상의 갈등과 등 돌리고 말년을 편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편한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무하 전시가 열린다면 말년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가 평생 그리고 싶었던 작품,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작품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무하의 전시에 가보면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그림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책에서는 삽화가 아주 큼직큼직해서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 대충 그림만 휘리릭 넘겨도 눈호강.
관객 없이 여유로운 전시장을 이곳저곳 누비는 기분이었다. 이 시국에 가장 안전하고 황홀한 전시가 아닐까.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