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훔친 남자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나무를 훔친 남자>를 비롯해 모두 8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있다.
<나무를 훔친 남자>
<알리바바 제과점>
<우리 시대의 아트>
<롤라>
<박수 치는 남자>
<수조 속에 든 여자>
<진실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
<인류의 업적>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니까, 순서에 관계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의미있는 순으로 고르라면, 제목에 ‘남자’,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들이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의미가 있지만, 이 세 편은 특히 그렇다.
<나무를 훔친 남자>, <박수 치는 남자>, <수조 속에 든 여자>
<나무를 훔친 남자>,
회사에 몇 그루 쯤은 항상 있는 나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니 그런 나무에 누가 신경을 쓰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 의문에 저자는 이 소설로 답을 해주고 있다.
나무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회사에서 그런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은 그 나무들을 자기 집으로 옮겨간 남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나무를 훔친 사람이다.
거봐 가짜잖아
정말 모르고 그랬을까요?
모를 리 있어? 딱 봐도 가짜인데.
미친 놈이네. (33쪽)
<박수 치는 남자>
시도때도 없이 박수를 치는 남자, 이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자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소설을 끌어나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슬플 때도 박수를 쳤다.
한 마디로 그것은 병이었다. 왜 미처 몰랐을까. 그녀는 어이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잘 살아. (151쪽)
그런 박수, 이렇게 쓰이기도 한다.
박수 치는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러한 생활에 만족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환승 통로를 떠나버렸을 것이다. (166쪽)
남자가 박수를 쳤을 때 그는 슬픈 기쁨을 느꼈다. 그 소리는 자신의 연주가 아니라 끈질긴 삶의 선율에 보내는 박수처럼 느껴졌다. (167쪽)
<수조 속에 든 여자>
이 소설집에서 이 작품이 단연 백미. 압권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박수 치게 만드는 소설, 꼭 읽어보기를. 박수 치는 독자가 되기를 .....
그녀는 수조에 갇힌 게 아니었다. 제 발로 들어간 것이다. 그녀의 들뜬 표정이 말해주었다. (173쪽)‘’
좋아 들어갈게
사흘 째 되던 날 그가 말했다.
오늘 밤 자정에 여기로 와. (178쪽)
거길 밟고 올라가면 돼
수조가 약간 흔들렸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가 냅킨처럼 허리를 접었다.
나머지 다리도 안으로 집어넣었다. (179쪽)
그 순간 이 소설의 제목은 바뀐다. <수조 속의 여자>에서 <수조 속의 남자>로.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해서 ‘남자와 여자 이야기’인 것이다.
어떤 남자, 여자인가?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다 어딘가 이상하고 괴짜 같은 사람들이다.
이런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만 주인공일까?
실제 현실에서는?
여기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들이 현실세계에서도 주인공이다.
너나 나나,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모두다 어딘가 하나쯤은 모자라고, 비어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그런 ‘우리’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수조를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다.
사람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얼 보느냐가 중요해. 이 유리 좀 봐,
나는 세상에, 너는 수조에 있지. 중요한 건 우라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는 거야. (184쪽)
다시. 이 책은?
우리는 이 책을 읽는다. 책 속에서 이상한, 괴짜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는다.
그런데 잠깐, 관점을 바꿔본다면?
“나는 세상에, 너는 수조에 있지. 중요한 건 우라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는 거야.”
“나는 책 밖에, 너는 책 속에 있지. 중요한 건 책 속에 있는 사람이나 책 밖에 있는 사람이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는 거야.”
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본다, 나를 보았다.
‘수조 안의 남자’가 바로 우리임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