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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쇠꽃
- 이도은
- 9,900원 (10%↓
550) - 2025-03-25
: 93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식된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예술로 삶의 무의미함을 정복하려는 시도"라는 핵심적 사유를 탐구한다. 그 방대한 서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시간성과 예술적 각성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철학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누구라도 향기를 통해 추억을 소환시킨 경험이 있듯이, 프루스트는 마들렌 케이크를 적신 차 향이 과거의 콩브레 시절을 생생히 소환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의지적 노력으로 재구성된 기억이 아닌 무의식적 기억의 각성이 진정한 과거를 복원함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공자의 논어에서 먼 옛날 요나라 순나라의 과거를 태평성대라고 회상하고 성경이나 쿠란은 창세기를 되돌아보라고 충고한다. 과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한강작가도 그랬듯, 이도은 작가도 '치유'와 '정체성 재구성'이라고 답한다.
'무쇠 꽃'의 이 도은 작가는 아궁이에 걸린 무쇠솥뚜껑을 여닫는 소리를 통해 '가난'의 냄새와 '엄마'의 그리움을 상대적 시간성 안에서 끄집어 낸다.
작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솥 뚜껑', '장롱', '슴베', '그랭이질', '뒤안', '쇠시리', '손수건', '명태', '능', '메꽃'이라는 랑그(langue)는 1970년대 한국적 가부장제 아래서 자란 세대의 집단적 무의식을 적시는 눈물과 애환이 스며든 파롤(parole)이다.
그녀의 의식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파롤을 통한 글쓰기는 상처받은 기억을 언어화(객체화)하며 시간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려는 여정으로,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 구축 과정을 완성한다.
무능하고 가부장적 아버지의 그림자와 실질적 세대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마치, 구멍 난 문풍지 사이로 스미는 겨울바람의 기억 마냥 '아픈' 회상만이 아니다. 신경과학자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가 증명하듯, 신체화된 트라우마들을 종이 위에 옮기는 행위 자체가 뇌의 편도체와 전전두엽을 재연결하는 신경학적 치유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지막이 얘기한다.
'나 아팠어'라고. 친구한테 부끄러워 말 못 했어. 근데 이제 나아져가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아니,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매일 몰래 적어내린 원고지 더미는 그녀가 과거의 '피학적 증인'에서 현재 '서술 주체'로 거듭나는 의식 변환의 증거라고 추론해 본다.
1970년대 빈민촌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그녀의 글은 침묵의 계보학을 넘어서, 개인사를 관통하는 사회적 폭력의 단면을 드러낸다. 책을 출간한 순간부터 그녀는 '가족의 부끄러움'에서 '세대의 기록자'로 역할을 전환하며,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적 영역에서의 용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난쏘공'이나 '천변풍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처의 알레고리에서 희망의 서사로 나아감은 정신분석가 융이 말한 '그림자 통합'의 현장이다.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은 '사회적 가난과 개인적 트라우마에 짓눌린 한 소녀의 무기력증'으로 재해석하며, 점진적 글쓰기로 인해 비로소 상처는 나만의 예술로 변주된다.
가난했던 동네 골목길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장롱이 주는 파롤은 문학적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빈곤의 수치심이 인간적 연대의 자양분으로 전환되는 이 기적은,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글쓰기 의식으로 구현된다.
낮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절제하며 고백한 소녀의 상흔으로 수놓은 자전적 지도를 읽으며,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엄마', '아빠'와 다시 만나 서로의 손을 잡고 시간의 강을 건너는 교차점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아비투스적 글쓰기가 주는 문학적 자아성찰은 가장 정치적인 치유 행위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재해석하는 실천적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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