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명에서 여성은 아름다움과 미, 곡선, 포용, 생명 탄생, 항상성 유지, 원죄, 무지, 죽음, 풍요, 대지, 바다, 유혹, 변덕 등으로, 남성은 직선과 이것이 함의하는 대립과 폭력, 발전과 파괴, 이성, 하늘, 바람, 떠남, 회귀 등에 자주 비유되어 왔다. 또한 서구에서의 여성은 풍요와 궁핍, 창조와 파괴, 현묘함과 어리석음의 상징하기도 하다.
특히, 인류의 원죄를 잉태시키고 질투 어린 판도라 상자에서 솟아난 악의 원흉이며 매혹과 유혹으로 남성 파괴적 기원을 가졌다고 상징한다. 그들의 토템과 신화는 이런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약성경 또한 여성에 대한 이해는 팜므파탈적 파멸이자, 유혹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로 살로메가 그랬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 블레셋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를 배신한 삼손의 연인 데릴라, 요셉을 유혹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게 만든 요셉의 주인인 포티발의 아내가 그러했다.
수메르 문명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를 거친 서양 문명은 여성을 선악과와 처녀 잉태, 뱀과 달, 메두사와 팜므 파탈적 치명적 악으로 인식했으며 사회적 신분 또한 노예와 같거나 그보다 미천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성경을 포함한 문학을 통해서 서구적 상상력에 녹아들게 되었다. 즉, 여자의 실존은 처음부터 악과 무지 그리고 원죄적 존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 여류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팜므파탈적 악으로서 여성상에 저항하기 시작하며 탈-여성상을 추구하는 사조가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아파트 맨 위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유한 한 여자가. 그녀는 가정부가 떠난 집에 혼자 있다가 처음으로 가 본 가정부가 쓰던 뒷방 장롱 안에서 나체 벽화와 바퀴벌레를 발견한다. 나체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고 곧이어 출현한 바퀴벌레, 그녀는 바퀴벌레를 옷장 문짝 사이에 끼워 죽이려 한다. 내장이 튀어나온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몰래 버렸다.
이 소설의 줄거리다.
사탄을 숭배하는 마녀가 된 여자는 무녀로 빙의하여 양심과 도덕을 말하고 바퀴벌레의 죽음과 내장을 삼키는 토템적 의식을 행하고, 종교와 타자, 사랑, 뱃속에서 죽어간 자신의 태아, 낯선 자신의 이름 G.H, 원죄와 지옥과 우로보로스적 삶과 죽음의 영원회귀와 무의식적 외침 즉, 인류가 여성을 학대한 그 모든 악과 추함에 대한 제의를 행한다. 희생 번제로 바쳐진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키는 의식으로.
"그래서 나는 바퀴벌레를 넘어설 더 고약한 무언가를 삼키고 고약한 무엇이 된 다음,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가 들을 수 없을 누군가가 듣게 될 무엇인가를 끄적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만 듣게 될 말들을."
늙은 무녀가 신의 제의 단상에 올라 희생 번재물인 내장을 삼키고 읊조리는 예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시키는 여성 부족의 구원자처럼 그녀는 인간의 죽음 너머의 언어에 대해 예언자적 묵시를 말한다.
그리고 할 말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할 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왜 침묵하지 않는 건지? 그러나 내가 억지로라도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면, 침묵이 나를 영원히 덮쳐버릴 것이다. 말과 형식이란 지푸라기에 매달린 채 나는 침묵의 파도 위를 떠돌게 된다.
24p
그런데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힘이 내게 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내면에서 고동치는 위대함이 나를 압도했다. 용기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가 결국 내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다.
71p
이건 미친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나 한낱 먼지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생각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에, 미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즉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왜 소름 끼치는가? 진실은 말 한마디 없이 이전의 내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익숙하게만 여기던 것 모두를 전복해버린다.
78p
아르테미스의 분노로 아가멤논이 예언자인 칼카스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비의 마음과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다 결국 아가멤논은 공적인 의무감으로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던지듯이 주인공 G.H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묵시록을 내뱉고서 결국 번제물인 내장을 입안에 넣으므로 죽음을 삼킨다.
신은 모든 모순을 포괄하므로, 그 무엇도 신에게 모순되지 않는다.
....(중략)....
삶의 본질적인 오류는 바퀴벌레를 보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나병 환자에게 입 맞추기를 역겨워하는 일, 그것은 내 안의 원초적인 삶을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역겨움이란 나 자신에 대한 부정, 내가 만들어진 원료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220~225p
지옥은 살아 있는 피투성이 고기를 물어뜯고 먹는 입이며, 먹히는 자는 즐거운 눈으로 울부짖는다. 지옥은 물질의 환락인 고통이다. (중략) 고통의 잔인한 수용, 자기 연민의 엄숙한 결핍, 자신보다 삶의 의례를 더 많이 사랑하기, 이것이 지옥이었다. 그곳은 타인의 살아 있는 얼굴을 먹는 자가 고통의 환락에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160p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논리를 해체시킨 그녀의 무의식적 중얼거림은 계시적 묵시록처럼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지각한 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녀는 지각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발현될 생명에 대한 우로보로스적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 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 내기, 맞다.
(중략)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무선 신호를 번역하게 될 것이다. 미지의 신호를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신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나는 몽유병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언어가 아니게 될 언어로.
25p
위대한 공포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내면을 향해 주의를 돌리고 자기 자신의 조심스러움을 더듬거리는 눈먼 자가 되어,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오직 본능에 의해 인도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열하고 총체적이며 한없이 달콤한 본능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아버린 사람처럼, 나는 쾌감에 전율했다. 마침내, 스스로의 내부에서, 나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위대함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생애 처음으로 샘물처럼 순결한 증오에 흠씬 취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죽이고 싶은 욕구에 흠씬 취했다.
72p
또, 인류의 원죄적 오명을 가진 이브가 삶과 언어, 죽음, 섹스, 관계, 어머니, 이해, 관용, 모성, 도덕, 사회, 윤회적 사고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날것의 벌거벗은 도덕으로 우리 앞에 서서 예언자적 음성으로 중성적 죽음을 얘기한다.
여성이라는 것, 그 또한 내게 부여된 천부적인 자질이다. 나는 천부적 자질의 용이한 면만을 누렸지, 소명의 두려움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게 두려운 것인가?
38p
나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아님'이야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41p
우리는 탈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다.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다. 인간으로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억지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총체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진실된 인간화 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삶은 행복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닿음의 상태이다.
238p
그녀는 낮인 동시에 밤이며 삶인 동시에 죽음이며, 여자인 동시에 남성으로, 선인 동시에 악으로, 미인 동시에 추함으로 빙의한다. 모든 무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그러하듯이,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킨 무녀의 입에서 늑대의 침처럼 흘러내리는 언어들, 육식과 살육, 피로 얼룩진 제단 위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육신의 입에서는 인간 삶의 고단했을 문제들 - 타자, 고독, 사랑, 낙태, 존재 등-에 대한 예언적 위로를 건넨다.
고독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음은 한 인간을 매우 매우 외롭게 만든다. 아, 구함을 통해서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
225p
그리하여 나는,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든지 간에- 타인에게 선한 행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는 것 자체가 위대한 자비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완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곧 타인을 위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산다면, 그 삶이 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방에서 홀로 이루어질지라도, 그는 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봉헌이다. 개인이 살아낸 모든 삶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위한 선행이다.
234p
이 소설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유혹적이다. 책을 펼치고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사우나탕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넋을 놓고 읽었다. 뜨거운 물에 표피가 익어서 장딴지 살이 아팠다.
문학에 대한 이해를 망치로 깨부순 책이었다. 문학을 안다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결같이 모르겠다는 답변과 어렵다는 얘기만 했다. 어느 나이 많으신 시인분께서 답해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쓴 작가라고.
왜 좋으신가요? 느낌이 음악적이고 시적이고 운율이 있잖아. 그런 멋진 상상력이 그냥 좋아. 달무리는 왜 좋은데? 전 어떤 미친년의 묵시적 언어가 마치 고행자가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동맥혈관 속 피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이게 소설인가요?
나도 모르지. 그건 자네가 더 잘 분석하잖아. 분석하고 내게도 알려주게나.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존재의 실존에 대한 무한한 불안과 권태를 이야기했다. 또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서 물질 추구적 인간에 대한 실존을 비판했다. 리스펙토르는 물질 추구적 세상뿐만 아니라 현대에 내재하는 토템과 신화적 여성상을 해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즉, 미친놈들로 가득 찬 세상에 미친년으로 매우 멋지게 응대해 준다. 이게 그녀의 통쾌한 실존적 삶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은 분만과 동시에 죽은 언니의 '흰 ' 죽음을 여성의 숙명으로 인식하였다.
리스펙토르는 뱃속 태아의 죽음을 숙명으로부터 환원시켜 생명으로 탈바꿈 시켰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여성은 결단코 원죄를 자행한 적이 없으며 지옥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지옥을 예찬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지옥이기에.
저주받은 무녀로서 여성과 남성들에게 외친다. 그 종교적 제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제단을 내려와 너의 삶을 죽어가라고. 현존의 지옥에서 벗어나 서구적 이데올로기가 빗어낸 그 지옥(천국)으로 가라고.
그녀의 묵시록에서 따뜻한 지성적 휴머니즘이 흘러나온다.
아, 내 사랑, 당신은 궁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더 위대한 운명이므로. 사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사랑은 사랑의 궁핍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욕망의 쇄신이 보장된다. 사랑은 이미 있다. 사랑은 변함없이 늘 있어왔다. 필요한 것은 은총의 일격뿐이다. 그것은 수난이라고 불린다.
236p
그녀의 이 책이 오랜만에 망치가 되어 주었다. 번역된 그녀의 책들을 모두 소장하고 싶어서 주문했다.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번역하신 작가님도 이 책이 어려워서 당최 뭔 말 하는지 모르지만 좋았다고만 하셨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