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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뱀으로 술 담그는 이야기
  •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2
  •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 9,000원 (10%500)
  • 2011-03-11
  • : 605



 법에게 눈물을...


  고의적 발치로 병역의무를 피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검찰에 기소된 MC몽은 무죄 판결을 받고, 징역6개월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유죄다 무죄다 말이 많고, 검찰도 항소하겠다고 한다. 일단 지금 당장은 무죄이다. 그런데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 사화봉사 120시간은 얼마나 적절한 것일까? 그리고 무죄 판결이 났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타격 입은 그의 이미지는 돌려놓을 수 없다. 그리고 판결을 지켜보면서 명쾌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법의 위상은 그리 높지만은 않다. 그리고 누구를 앉혀놓은들 모두가 수긍할 완벽한 판결이 나올까?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행하는 법은 완벽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판사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니 동네 축구의 심판도 좋고, 투닥거리는 형제의 부모도 좋고, 싸우는 친구를 말리는 입장도 좋다. 누구든 “내 얘기좀 들어봐!” 라며 제3자의 눈으로 봐줄것을 부탁 받을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사건의 전말 +법, 규칙, 도덕, 나와의 관계, 타인의 시선, 사건의 전말, 이 일과는 직접적 상관은 없지만 심적으로 연결된 일들.... 등을 순식간에 뒤섞어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난처한 부분이 있다. 한 쪽이 완벽히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료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 인데, 판사는 어떻게 유죄와 무죄의 그 경계를 나눌 수 있을까
 

 책은 여러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하나의 사건이 짧은 소설처럼 쓰여 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저자가 왜 변호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제 그만 소설가로 전업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저자는 법정에서 ‘사건파일’, ‘미결사건’과 같이 딱딱한 제목 아래 너무도 간추려 정리되어있을 사건을 한 편의 소설로 무척 흡입력 있게 풀어놓는다. ‘축제’ 편에서는 덥고 어지럽고 단체로 정신을 놓은 장소에, ‘심판’ 편에서는 10년을 폭력을 감수하며 아이를 지켜오던 여자의 집에, ‘가족’ 편에서는 대를 내려오는 범죄력 속에서 고뇌하는 남자의 앞에 독자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묻는다. ‘자 이 사람은 죄인인가요?’ 혹은 ‘누가 죄인인가요?’ 혹은 ‘죄인은 있나요?’ 라고 말이다.

 
 첫 이야기는 ‘축제’이다. 축제날의 더위와 오르는 술, 그리고 소음과 음악이 합쳐진 그 거리에 내가 서있는 듯 느껴진다. 첫 이야기에는 단 한명의 피해자만 나온다.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어린 피해자 한명 뿐, DNA 단서는 더위 속에 모두 쓸모없게 되어버렸고, 가해자들은 훈방조치 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용의자 아홉 중 한 사람을 변호했다.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구도로 보자면, 그의 승리였다. 그게 과연 승리였을까? 법의 입장에서는 지독한 패배였다. 이 ‘축제’편에서는 법의 한계, 변호사의 입장을 쓰게 보여준다. 판사와 검사 의사, 그리고 시민들이 분노했지만 그들의 분노도 법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처참한 법의 패배이다. 
  

 책을 읽다보면 유죄와 무죄로 단 두가지로 가르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아가서 법이라는 것의 한계가 보인다. 판정이라는 것은 어느 기준의 판정인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사회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언듯 보면 명확한 개념도 복잡한 사건 앞에서는 쉽지가 않다. 인간인 판사가 보기에도 유죄만큼 깨끗하진 않은데 무죄만큼 더럽지는 않은 순간은 얼마나 많을까? 정의가 지켜주고 벌하는 그 경계선은 얼마나 애매할까? 
 

 책에서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무죄를 선고받는 여인이 있다. 게다가 실제 살인범은 따로 있었지만, 법정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수사를 진행시키지도 않고, 여인을 무죄로 만들어준다. 이렇게만 본다면 말도 안되는 판결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10년의 결혼생활 동안 처참한 폭력속에서 살았다. 단지 딸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그 폭력이 딸에게 옮겨가는 것을 막으려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이 정당하다는 상황은 없지만, 적어도 이 여인은 법이 구제한 한 가여운 생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의 한계 앞에서, 완벽한 심판이라는 것은 정말로 신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시간과 사건이 지남에 따라 법은 조금씩 더 완벽해지고는 있겠지만 영원히 그 영역에는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법이라는 시스템에 존재하는 인간적 한계를 직시하면 좀 더 명판에 가까운, 좀 더 신의 판결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히 무죄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유죄로 할 수는 없는, 또는 유죄인게 빤한데 무죄로 만들어지는 법의 시스템과 인간의 지독한 면을 계속 보면서 변호사 생활을 계속 해 온 저자에게, 16년동안 형법 전문 변호사로 살았으니 이만하면 글감도 주변지식도 충분할테니, 그만 하고 작가로 전업하는 것이 어떻느냐 묻고싶다. 특히 추리소설로... 그럼 내가 꼭 찾아볼텐데...


 

(+)

깨닫고보니 법에 대한 비관적인 글을 쓰고있다.

여러분 그렇지만 법은 지켜야해요.

최후 승리자는 변호사인가.

사건에는 휘말리지 않는것이 최고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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