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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유홍준
  • 20,700원 (10%1,150)
  • 2017-08-21
  • : 16,397

  서문을 읽고나니 내가 얼마나 서울을 모르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울에서 참 오래 살았다고,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권(서울편 1)의 서문이 던지는 물음이었다. "궁궐의 도시". 나는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학생 시절 사생대회, 백일장 등의 이유로 덕수궁, 경복궁을 적잖이 가봤지만 덕수궁의 석조전과 경복궁의 근정전, 경회루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울에 5대 궁궐(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경희궁)이 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종묘 정전의 모습이 담긴 표지 사진을 보면서 이미 나는 서울 궁궐의 아름다움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권 (서울편1)은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을 다루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울의 대표 궁궐은 아마도 경복궁이나 덕수궁일 것이다. 왜 일반인들과 친숙하지 않은 종묘, 창덕궁, 창경궁일까 ? 책을 읽어나가며 그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종묘가 서울편의 첫 장을 장식한다. 건축미나 역사적 의미로 볼 때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이기 때문이리라. 몇 년 전 가을, 종묘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날이 기억난다. 정전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충격과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엄이었다. 아련했던 그날의 기억이 책을 읽으며 살아났다. 구체화 되고, 단단해 졌다. 파격을 추구하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종묘 감상을 읽으며 종묘를 너무 늦게 깨달은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정전은 가슴 높이의 월대 위에 세워져 있다. 월대는 정전을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구분지어 놓았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제례를 열고 있다. 종묘의 건축미와 어우러지는 엄숙한 의식, 그리고 제례악을 꼭 한번 느껴보고 싶다. 

 종묘에 이어 작가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권 (서울편 1)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궁궐은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낯설다. 덕수궁이나 경복궁은 많이 가보았지만 창덕궁은 가보지 못했다. 경복궁이 조선시대 첫번째 법궁으로 지어졌으나, 태종부터 대부분의 왕들은 창덕궁에서 지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왜 그런 창덕궁을 이제껏 알지 못했을까? 왜 아무도 창덕궁이 조선 궁궐의 심장임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어렸을 때 창덕궁은 이름이 없었다. 일제시대 조선 왕조의 색체를 지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창경궁과 분리된 창덕궁은 우리에게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창덕궁 후원만을 강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나마 비원은 정해진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는 제한구역이었다. 저자는 그런 창덕궁의 참모습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유명 작가나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어 그 감흥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창덕궁의 규모에 놀라게 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1830년 무렵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에 나타난 창덕궁의 많은 전각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 나라의 대표 궁궐 다웠다. 창덕궁의 진수는 각 전각들과 자연이 어우려져 뿜어내는 분위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경복궁을 돌아보며 느꼈던 황량함이 창덕궁에는 없을 것 같다. 창덕궁의 전각들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나무와 어우려져 있으면서 자유롭다. 창덕궁 소개의 끝을 지나며 마치 친절하고 박식한 안내자를 따라 창덕궁을 하루 종일 구경하고 나온 느낌에 마음이 벅찼다. 

 창경원 답사기를 읽으면서 처연한 마음이 앞섰다. 어린시절 어머니와 갔던 창경원이 머리속에 어렴풋이 그려졌다. 창경원에는 동물이 있었고, 놀이 기구가 있었다. 동물원으로 기억되어진 그곳은 조선 왕조의 궁궐이었다.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변해 버린 창경궁은 1983년 다시 본래의 이름과 모습을 되찾았다. 창경궁은 왕비와 왕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세종 때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지은 것이 창경궁의 시작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사건들의 무대가 바로 창경궁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이 휘령전이며 장희빈이 사사 된 곳도 창경궁 내에 있는 통명전이다. 이렇게 사연많은 궁궐이라니. 넓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창경궁이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권(서울편 1)을 읽는 내내 먹먹함과 놀라움이 교차되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을 덕수궁으로 쫓아냈다. 그 아들 순조는 창덕궁에서 생활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고종의 딸,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아름다운 궁궐의 전각들이 소개될 때마다 그 시절 임금와 신하들이 한가롭게 거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곧 조선왕조의 슬픈 결말이 떠올랐다. 창덕궁에 지금도 왕이 살았다면, 그랬다면 창덕궁은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책장을 덮으며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가 몇 일 동안 살다 온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조선 궁궐 답사기는 생생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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