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 위한 단체 '반올림'의 농성 현장을 자주 지나쳤었다. 그들의 외침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는 못했지만 꽃다운 나이에 무서운 병에 걸려 고통 받아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언론에서는 백혈병의 발병 원인 규명이 매우 어려워 사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 내었다. 고려대학교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개인의 건강에 관한 문제가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설명한다.
김승섭 교수는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전공했다. 매우 낯선 학문이다. 심각한 질병이 발생할 때마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역학조사를 실시한다. 그 병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후사정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역학'은 무엇인가?
"사회역학은 그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
질병의 발생 원인을 사회적 관계에서 찾는 학문이다. 사회역학에 대한 정의에서 그 학문의 길고 고됨이 느껴졌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를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돌리는데 익숙하다. 누군가 사고를 당하면 사고를 당한 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먼저 캐묻는다. 그리고 개인의 잘못이 드러나면 모든 책임이 그에게 지워진다. 공장에서 작업 중에 다쳐도 위험한 작업 환경보다는 개인의 부주의를 탓한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저자 김승섭 교수는 개인의 건강에 관한 사회적 책임을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오랜 시간에 걸친 자료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책에서 소개되는 연구 사례 중에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건강연구였다. 2009년 4월 쌍용자동차는 노동자 2,646명을 정리해고 했다. 2009년 4월 정리해고 현재까지 14명의 해고자와 가족이 자살하였다. 2009년 공장 점거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걸프전에 참가한 군인보다도 높은 비율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 실업이란 하루 아침에 삶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을 동시에 겪으며 쇠약해 갔던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삶은 개인의 건강한 삶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소방공무원, 전공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다양한 연구 과제를 통해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다. 책에 제시된 연구 과제와 데이터를 보는 내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개인의 질병은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명확하게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관점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고민이지요."
저자는 1960년대 미국 로세토 마을의 예를 들어 사회적 연대가 건강한 삶의 필수 요건임을 이야기 한다. 로제토 마을은 이탈리아 이민자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던 의사들은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로세토 마을에서는 주변 마을들과 달리 유난히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찾던 연구자들은 보고서에서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밝히면서도, 로세토 마을 사람들은 삶을 즐기고, 활기가 넘친다고 했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였으며 서로를 도와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진정한 가난은 없었다. 이웃들이 빈곤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특히 이탈리아에서 이주해 오는 소수 이민자들에게 그러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는 가정이 있으면 서로 도왔고, 부모의 사망으로 남겨진 아이들을 함께 돌봤다. 로제토 마을 사람들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로세토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이 흘러 로세토 마을의 공동체 의식도 사라졌고, 유난히 낮았던 심장병 사망자의 숫자도 여느 마을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저자는 로세토 마을의 예를 들어 사회적 연대가, 건강한 공동체가 건강한 삶의 요체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덮기 전에 지은이 김승섭 교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넉넉치 않은 집에서 자랐다고 밝히고 있는 저자는 경제적 여유가 보장된 의사의 삶을 버리고 사회역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소송, 삼성 반도체 피해자 소송 지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다리'라는 모임의 후배들에게 남긴 글을 통해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노라 다짐한다.
책을 덮으며, 개인의 삶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가난, 개인의 질병...그동안 우리가 "너는 왜 더 노력하지 않았니?"라는 말로 잊고 지냈던 사회적 책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고통 받아 왔음을 알게 되었다. 개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 만으로 이 책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