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다?
곰곰 2007/10/21 20:43
곰곰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혹은(실제로는 아니지만) 감시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기분은 더럽고 행동은 막가파식으로? 그래 세상 좋아져서 그럴 수 있다. 근데 과연 그럴까? 정말 세상이 변했을까?
이제 감시관은 당신에게 말한다. "감시에 의한 행동의 억제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나아가 이것이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며 결국에는 사회적 이익을 창출한다." 좋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에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진 공리주의자 벤담. 위의 감시관은 다름 아닌 벤담 그 자신이다.(실제로 그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시설을 고안하면서 감옥이 건설되면 자신을 간수로 임명해 줄 것을 프랑스의회에 정식 요청했다.)
그는 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시설을 고안해냈으며 스스로를 간수로까지 임명해 달라고 했을까? 그보다 먼저 파놉티콘은 과연 뭘까? 간단히 말해 원형건물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가운데 원형건물이 있으며 그 건물을 또 다른 건물이 둘러싸는 형태. 즉 한 건물안에 또 다른 건물을 살짝 집어넣은 형태 말이다.
"이 건물은 중앙의 한 점에서 각 수용실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된 하나의 벌집과 같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이라고 부를 것이다."(23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벤담은 공리주의자다. 그는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다. 또한 그는 법률학자로서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가치 안에서 법이 집행되기를 바랐으며, 자유방임 자본주의자로서는 이익이 모든 가치 중 으뜸이 되는 사회를 꿈꿨다.(7쪽) 이것이 벤담으로 하여금 파놉티콘을 구상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계획은 발명자인 제가 처음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15쪽)
그런데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은 감금 시설에 대한 계획이다. 그는 왜 감금시설을 구상했을까? 도대체 감금 시설과 공리주의자로서의 벤담이 주창한 산업화(사회적 이익 창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당시의 사회상을 잠깐 살펴보자. 근대 이전의 감옥은 처벌을 하기 위한 수감 시설이 아니었다. 단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거나 형벌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감금 시설에 수용하는 처벌이 생겨났다. 즉 새로 등장한 감옥은 과거의 것과는 달리 구호시설과 관계된다. 이러한 구호시설에 들어온 자들은 이제 올바른 정신을 갖도록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 점차 그들(수감자)에게 자본주의의 질서를 교육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고립된 곳에서 그들이 근대적 삶을 익히고 특히 노동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당시 사회가 바라던 것-그리하여 결국에는 수감자들이 수감생활을 끝내고 사회로 돌아가 자본주의체제하의 사회적 이익 창출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으로 벤담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새로운 사회 모델로 감옥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놉티콘은 당연히 감옥 계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벤담에게 파놉티콘은 사회의 모든 곳에 적용되어야 할 모델이라는 것이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통해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71쪽) 하지만 파놉티콘은 실현되지 못했다. 몇몇의 사소한 문제로 인해 벤담의 파놉티콘은 실패했지만 문제는 파놉티콘 그 자체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통찰은 옳다. 그에게는 파놉티콘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의 대상이다. 이것은 푸코만의 독창적인 역사접근 방식('사건'중심)에 기인하는데, 중단된 상태의 "프로그램은 실제로 실행된 것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며 합리적 형태에 속한다."(121쪽) 즉 실현된 프로그램은 그 과정중에 수많은 수정과 첨가, 이해관계로 인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지만 중단된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본질과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난 파놉티콘. 푸코에게 파놉티콘은 근대 '권력'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장치다.
파놉티콘 내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권력의 개념은 다음의 두 가지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한다. 두 번째로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라 '생산'하는 것이다.(123쪽) 다시 한 번 파놉티콘을 상기하자. 누가 감시하는지 모르지만 항상 감시되고 있는 상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파놉티콘이다. 수감자는 항상 자신이 감시받는다고 느끼고 스스로를 감시하며 자기 통제를 내면화한다.(91쪽)
푸코는 파놉티콘에서 바로 이 점을 간파한다. 근대 권력의 핵심은 과거의 권력체계처럼 권력을 권력자가 '소유'하여 직접 행사(공개처형과 같은 보여주기식 권력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의 내면화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여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권력망에 있도록 스스로를 '작용'시킨다. 또한 신체를 '억압'하여 권력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감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작은 사회 그러나 서로 감시하는 사회, 이 사이에서 벤담이 기대했던 위안이나 우정이 가능할까? 이익의 만유인력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일상의 세부까지 파악하려는 파놉티콘 원리가 장악한 사회, 즉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노동과 이익을 위한 유용성이 중심이 되는 '완전한 통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있는가?(118~119쪽)
지나칠 정도로 유용성을 강조한 벤담에게 파놉티콘은 하나의 유토피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그의 이러한 관점은 식민지 정책을 옹오하는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공리주의적 한계는 결국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낭만적 개념이 역사적으로 '(권력의 연장을 통한) 그들만의(지배권력) 행복'이라는 주장의 다름 아니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더 서글픈 것은 이러한 권력의 작용이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 위의 군대, 공장, 학교 그리고 직장에서 지금도 방식을 달리하며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진정 그들은 승리한 것인가?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