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목을 보고, 피지컬 인공지능 시대를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도입되면 경제적 생산성 향상을 위한 인간의 모든 역량이 로봇에 의해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기대와 다르게 미래가 아닌 현 세태를 꼬집었다. 저자의 시각에 의하면 현대는 게으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게으름은 유독 서구 선진국에 집중되며 이는 과다한 복지와 물질적 풍요, 신앙과 공동체의 해체, SNS 등 주의력을 빼앗는 것들로 인해서다.
인간의 욕구는 크게 생존과 소속감, 자기 완성이다. 인간에게 생존은 매우 오랜 기간 아주 중대한 과제였다. 생명의 존재 목적이 유전자의 전달에 있는 만큼 그를 위한 충분한 생존은 지구상의 생명체에겐 지상과제고 인간도 다르지 않다. 때문에 생존을 위한 욕구는 가장 강력하며 소속감, 자기 완성도 사실상 이 욕구에서 파생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 중 거의 유일하게 장거리 움직임이 가능하다. 매우 느리긴 하지만 인간은 하루 15km를 걸을 수 있다. 다른 대형 유인원들은 하루 이것의 10-20%정도만 이동이 가능하다. 인간의 몸은 순간적인 힘은 포기하는 대신 이처럼 장기간의 저속 신체활동에 맞게 설계되었는데 이는 근육량을 줄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두뇌를 크게 발달시켰는데 여기서 하루 25%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크게 생각하는 일이 없어도 그렇다. 이러니 인간은 비싼 조직인 근육으로의 투자를 크게 줄였고, 그나마의 근육도 유지비가 비싸기에 조금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바로 제거한다.
과거 중세와 근세 농경사회에서는 아이를 10명 가량이나 낳았다. 이는 낮은 생존률 때문이다. 첫돌을 넘기지 못하는 아이가 출생앙의 1/3에 달했고, 성인기까지 살아 남는 경우는 절반이었다. 수렵사회도 생존은 쉽지 않았다. 인간은 서로 간에 살해를 자행했는데 전체 사망자의 약 10%가 분쟁으로 인한 것 때문이었다. 그들의 뼈에는 각종 무기로 타격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는 매우 높은 비율인데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살핀다면 양차대전을 포함해도 분쟁으로 인한 사망률은 1%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은 인구가 증가하지 못하는 일종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농촌에 흉년이 들면 생존을 위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한다. 그러면 인구과 과밀하여 생활환경이 악화되고, 감염병이 창궐한다. 그러면 도시의 인구가 격감하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시 농촌이 인구가 도시로 유입인다. 그러면 농촌의 인구가 부족해져 다시 흉년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개개인의 생존이 힘드니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래서 과거 소속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개인은 소속을 위해 공동체가 정한 틀에 스스로를 끼워맞췄고, 기대하는 정체성을 뒤집어쓰고 요구되는 시험을 통과하려 애썼다.
공동체에 소속되면 여기선 자연히 서열이 중요했다.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면 생존과 번식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공동체 내에서 뛰어난 전사, 사냥꾼, 현자, 샤먼 등이 되기 이해 노력했다. 이는 타고남에 기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엄청난 노력을 요구했다.
마지막인 자기완성은 각 문명이 제시한 완벽이라는 이상적 궤도에 자신의 삶을 올려놓는 것이다. 조선시대였다면 이상적 선비가 되는 것이었을 테고, 산업화 시대라면 능력있는 경영자나 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각 문명의 이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상에 도달하면 개인의 생존과 공동체로의 소속을 크게 높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개인에게 상당한 성취감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문명의 아싱에 도달하려면 공통적으로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처럼 생존, 소속감, 자기 완성은 모두 엄청난 노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를 위한 노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공동체가 이룩한 번영의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과거 조상들이 쌓아올린 물질 문명의 혜택으로 인해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소속을 위해, 자기 완성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다.
프랑스의 경우 노력의 감소는 많은 부분에서 지표로 드러난다. 2021년 기준 국민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스위스가 895.9시간, 미국이 825.9시간, 독일이 724.6시간인데 프랑스는 630.9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프랑스는 고용률도 떨어진다. 독일보다 9% 낮은데 이는 국민들이 여가를 더 선호해 노동과 소득이 동반 감소해도 여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일을 적게하면 노동생산성이라도 높아야 하는데 이것도 낮다. 프랑스는 적은 노동시간으로 인해 1인당 GDP가 1980년 세계 13위였지만 지금은 25위로 추락한다.
미국에서는 채용담당자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졸 면접 지원자의 53%가 눈을 제대로 면접관과 마주치지 못했고, 50%가 터무니 없는 연봉을 욕하고, 47%가 부적절한 복장, 27%가 부적절한 언행, 21%가 화상면접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꺼놓고 켜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신입사원의 33%가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61%가 상습지각을 하며, 59%가 마감을 어기거나 업무를 빼먹고, 53%는 회의에 자주 늦고, 58%가 걸핏하면 화를 내고 63%특권의식을 갖고 있다고 파악했다.
학력문제도 심각하다. 프랑스의 경우 대입자격시험은 바깔로레아는 과거 비교적 엄격했다. 합격률이 1960년대만 해도 60%였다. 하지만 2017년엔 88%로 상향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절대적 학력 상승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1967년까지 응시자의 0.3%에게만 매우우수의 등급을 부여했지만 지금은 10%수준으로 올라왔다. 즉, 점수를 기준에 못미쳐도 후하게 주는 결과란 셈이다.
현대인은 과거와 다르게 소속이 필수가 아니다보니 주어진 틀에 더 이상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고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거나, 오히려 자신에게 맞춰줘야 소속을 선택한다. 현대인은 고통감수를 하려 하지 않고 즐기기 위해 태어나고 즐기기 위해 생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자율을 향한 추구만 남고, 고독과 쾌락이 더욱 판을 치고 있다.
현대인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더 이상 두려움과 매력의 대상이 아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경계하고 배우려 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노력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즉각성과 동시성만이 중요하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심판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도 않는다. 현재의 매순간은 곧바로 다음 순간을 불러내며 본질적으로 그 순간 자체가 아닌 그 다음을 향한 갈증 속에섬나 실재한다.
현대인은 예의도 결여되어 있다. 소속이 되어 있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더불어 사는 법을 모른다. 과거에는 견고한 토대 위에 사회규범의 양상이 조금씩 변화했지만 지금은 사회적 관계의 본질 자체가 뿌리채 흔들린다. 과거에는 품위의 유지가 사회적 지위에 비례했다. 품위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곧 교양이 부족한 하층민임을 입증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계층이 어느 정도 품위 유지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현세대는 자기 중심적이어서 타인이 옆에 있어도 행동을 수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다. 타인과의 거리로 인해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상호간의 예의에서 비롯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이 조금만 닿아도 공격당했다고 여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의 시민은 자신과 맞지 않는 생각이 조금만 들어도 트라우마를 호소한다. 날로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고통을 호소한다. 물론 이러나 새로운 기질은 사회를 경직시키고 마비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자 역설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통제하려 든다. 그래서 자신과 다르면 공격하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출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것이 가져올 결과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지의 박탈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값싸고 무질서한 쾌락에만 의존한다. 현대의 잘못은 쾌락에 등급을 매기지 못한체 어리석은 쾌락에 절제 없이 몸을 내맡겼다는 점이다. 값싼 쾌락, 포르노나 마약, 술, SNS, 숏츠, 정크푸드 등은 대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더 강한 쾌락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뭐든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빠른 리듬과 흥분의 동반으로 현상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게 한다. 사람들은 점점 독서를 하지 않는다. 읽기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읽기는 글자를 해독하고, 집중해야 하고, 책의 내용을 그려내야 하는 복잡다단한 작용이다. 하지만 영상은 매우 쉽다. 그저 주어진다.
글에서 영상으로의 전환을 단순히 매체 전환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지만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문명의 퇴보다. 영상에 의존하면 학습을 느려지고, 침묵의 감각은 사라지고, 깊이 있는 분석도 없어진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변하고 표현도 획일화한다. 이미지는 글을 해석한 것인데 그것을 영상을 이미 하나로 고정해 각 독자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2023년 21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경제적 질문은 인간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지의 쇠퇴, 의욕의 저하, 쓸모를 잃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위대한 우울을 어떻게 막아낼지가 과제인 것이다. 저자는 노력은 멋진 경력, 유익한 즐거움, 건강한 몸 같은 더 높은 목표수단의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소명이라 말한다. 저자는 최근 능력주의의 대두로 노력이 폄훼되기 있기는 하지만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고치고 다듬으면 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