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예술이나 건축은 동양과 다르게 흐름이 느껴져서 나름의 재미가 있다. 이번 책도 그런 일련의 흐름으로 보았고, 일본인이 쓴 것으로 비교적 쉬웠다. 건축은 건축가의 생각외에도 시대에 따른 정치와 경제 그리고 지배자나 권력자의 존재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건축이란 건축가와 사회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역사상 최초의 건축가는 아마 알수 없겠으나 저술로 파악한다면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의 비트루비우스가 될 것이다. 그는 세계최초 건축 전문서 건축 십서를 저술했다. 10권으로 건축의 원리와 역사, 신전, 극장, 목욕탕 가옥 등 다양한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었다. 책은 무려 15-16세기 다빈치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오래도록 미쳤다. 그는 책에서 건축의 3원칙을 제시했는데 기능, 구조, 미학이다 이중 기능과 구조는 시대에 따라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나 미학은 시대에 따라 무척 다르게 정의된다.
동양건축은 나무 중심이다. 나무는 자연 친화적 재료지만 내구성이 약해 아주 오래가진 못한다. 나무는 자연과 순환 개념을 가진 재료로 자연과의 공생을 지향한다. 그래서 동양의 목조 주택은 툇마루가 있어 안과 밖을 연결한다. 즉, 외부가 내부로 스며들고, 내부가 외부로 확장하는 구조다. 반면 서양의 건축 재료는 돌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것으로 외부를 위협으로 여기는 세계관이다. 이는 유럽의 혹독한 기후와 풍토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런 건축문화는 유럽의 인간중심주의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는 이오니아식 신전을 만들었다. 기둥이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으로 발전했으며 세 형태 모두 오더형식이다. 오더는 원주와 이를 받치는 기단, 기둥위에 놓은 들보와 지붕을 포함한 각 부분의 형태와 치수의 균형을 의미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이다. 신들의 조각가라 불린 페이디아시의 지도하에 건축가 익티노스가 설계했다. 기원전 438년 오나성했다. 폭30m, 길이70m로 기둥이 양쪽끝에서 중앙으로 갈수록 부풀어 오르는 엔티시스 형태다.
로마에서는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브라타니아에 118km짜리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고,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하드리아노폴리스를 8개 건설했다. 아테네를 재건해서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완공했다. 그는 118-133년까지 로마 북동쪽 티볼리라는 도시에 광대한 별장인 빌라 아드리아나를 건설했다. 여기에 로마 속령의 매력적인 건물 30개 이상을 재현했다. 그는 로마의 판테온을 설계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것을 재현한 것으로 8개의 원주가 삼각형 지붕을 받친 입구는 파르테논 신전의 느낌이며 원형홀은 천장이 반구형 돔으로 중앙에 구멍이 있어 안으로 빛이 쏟아진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4층 원형 경기장이다. 1층 기둥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위로 갈수록 기둥이 가늘어져 시대상과 건축원리를 반영한다.
로마는 395년 동서로 분리했다. 로마 기독교 교회는 바실라카식 기독교 교회 형태를 채택했다. 이는 라틴 십자가 형태다. 동로마 비잔틴 교회는 비살리카 평면위에 반구형 돔을 얹은 양식이 주류다 수평적이고 일방적인 바실리카와 달리 중앙공간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룬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건축했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반구형 돔을 덮었고 직사각형 평면 위에 돔을 얹는 것이 어려워 당시 평면을 정사각형으로 하였다. 153년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자 아야소피아는 모스크로 용도변경한다. 원래 모스크는 긴 복도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야소피아는 무슬림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이 때부터 다른 모스크들도 둥근 양식이 생겨나게 된다. 1617년 술탄아흐메드 모스크가 대표적인데 53m높이의 돔에 64m 미나레드가 4개나 된다. 기둥만으로는 돔의 무게 지탱이 어려워 여러 크기의 돔을 조합한 후 커다란 돔을 얹는 구조를 택했다.
11-12세기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라는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로마건축을의 회귀 움직임이다. 특지은 두꺼운 벽과 반원형 아치, 볼트라고 불리는 반원형의 노출된 천장이다. 대표적인 건물이 피사 대성당이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건축으로 발전하며 한 가지 기술적 변화가 일어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측랑의 지붕을 아치 아래 숨겨두었는데 고딕 건축은 이를 측랑의 지붕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옮긴 뒤 플라잉 비트레스라는 아치를 설치해 외벽을 보강하였다. 이로 인해 고딕 양식 때는 로마네스크 시기 보다 훨씬 높은 천장 건설이 가능해졌다. 벽에 대한 하중부담도 적어져 벽이 얇아져 창문 설치가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스테인 글라스가 등장했다.
이로 인해 고딕성당이 탄생한다. 고딕 성당은 높은 천장으로 인해 거기서 쏟아지는 햇빛이 장엄함을 연출했고, 종교화가 그려진 스테인 글라스의 환상적인 색채, 그리고 높은 천장이 주는 공간감에서 울려퍼지는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함이 결합하여 신자로 하여금 강력한 신성을 경험하게 하였다. 대표적 고딕 성당이 노트르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퀼른 대성당이다.
14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다. 로마 붕괴 이후 이탈리아는 통일 왕조가 없었다.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강력한 중앙의 간섭을 받지 않아 새로운 문화 혁신이 오히려 유리했다. 도시 국가의 귀족이 무역과 상업으로 얻은 부로 예술가와 지식인을 후원하여 기독교 중심의 중세와 다른 문화적 기반을 생성했다.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다. 그는 3차원의 입체건물을 2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투시도법을 창안했다.
바티칸 시국에는 성베드로 성당이 있다. 이 역시 아야소피아 처럼 여러번 개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1세가 324년 창건했고 당시엔 돔이 없었고 바실리카의 전통형태였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626년으로 당시 이탈리아 대표 유명 건축가들이 모여 만들었다. 15세가 교황 티콜라이 5세가 대성당의 재건을 처음 계획했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가 개축을 다시 시작했고 수석건축가를 공모하여 브라만테가 선발되었다. 그는 중앙에 커다란 돔을 배치한 그리스식 십자형의 평면을 구상했다. 하지만 둘다 꿈을 실현 못하고 죽고, 계획은 좌초하다가 72세의 나이에 수석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이를 실현한다. 그는 브라만테의 집중식 평면을 구현하고, 8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돔의 하부구조를 완성한다.
200년이 지나 17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건축은 쇠퇴한다.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로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종교적 권위가 건축을 주도했다. 하지만 주도권이 프랑스로 넘어갔고, 여기는 절대왕정의 군주가 건축의 중심이 되고 바로크가 새로운 사조가 된다. 그래서 궁정이 건축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아르두앙 방사르는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 참여했고 블루아 성을 설계한다. 건물의 모서리가 곡면으로 처리되고 내부 공간이 타원형이 사용되는등 바로크의 영향이 뚜렸했다.
바로크에 이어 로코코도 시작된다. 로코코는 프랑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로카유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로크 시대 정원에서 바위를 조합해 만든 장식을 로카유 방식으로 불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복잡한 실내 장식을 의미하는 언어로 사용되었다. 로코코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다지인으로 후대인에게 퇴폐적 느김을 주었고 실내 장식에 치중하였기에 건축사조로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건축의 배경에는 사회적 가치관이 자리한다. 르네상스가 근대 과학의 문을 열었다면 산업혁명은 공학의 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851년 영국에서 세계최초 세계 박람회가 개최된다. 하이드 파크에 조셉팩스턴이 철과 유리로 길이 560미터 폭 120미터의 거대 건축물을 10개월만에 완성한다. 30만장의 유리를 사용한 크리스털 팰리스다.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라틴십자가형이다. 수정궁은 박람회 후, 런던 교외로 옮겨져 오락시설로 사용되다 1936년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되지 않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875년 완성되었다. 코린트식 장식과 아치의 고전적 요소가 있고, 철골을 사용해 기둥이 가늘고 가벼운 느낌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이탈리아 밀라노 쇼핑아케이드 두오모 광장에 있다. 일류브랜드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명소다. 고전양식과 중세느낌이지만 천장에 유리와 철로만든 볼트를 통해 빛이 스며들며 38미터에 달하는 유리돔이 있다.
한편 산업화에 따른 대량생산에 대한 반발로 중세 고딕 양식의 부활을 주장하는 라파엘 전파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트앤 크래프트 운동이다. 모리스가 주도했고, 미국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훗날 아르누보라는 국제적인 미술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으로 파리세계박람회가 열리고 획기적 건축물로 에펠탑이 건설된다. 그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미 워싱턴 기념탑으로 167미터였다. 에펠탑은 이를 아득이 넘어서는 300미터였다. 에펠탑은 연철로 만든 것으로 철은 주철, 연철, 강철 순으로 발달했는데 당시는 연철의 시대였다. 그리고 높은 건물이었기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당시 엘리베이터는 수압식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로 신도시였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 이전만 해도 인구 200명에 불과한 무법지대였다. 하지만 골드러시와 아메리카 대륙횡단철도의 개통 이후 인구가 15만으로 폭증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구가 폭증하며 도시계획을 했고 골든게이트 공원은 1871년 조성한다. 거리가 이 공원을 중심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정비하여 주택을 분양한다. 당시 주택은 빅토리아 양식의 목조주택으로 무려 4만호가 건설되었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미국 시카고는 미시간 호수와 대서양이 운하로 연결되는 곳이다. 상품거래소가 있어 미국 전역의 농산물이 모인다. 시카고는 1880년대 교외에 풀먼 공업도시가 개발된다. 무려 6000개의 회사 직원과 가족이 거주가능한 도시였다.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이 도시가 큰 주목을 받았고, 3년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도시로 국제적 표창을 받는다. 하지만 1890년대 금융 대공황 이후 직원 처우를 두고 파업과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기업이 거주민의 삶을 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다. 결국 1898년 일리노이 법원이 기업이 도시 건설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며 1909년 매각되며 역사로 사라진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가 일어나며 도시가 재정비된다. 경제 발전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사무실 수가 증가하며 고층빌딩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시카고는 10층 이상의 고층 빌딩으로 재편된다. 당시 뉴욕조차 5층 빌딩이 대세였다. 이는 철골구조와 엘리베이터로 가능했다.당시 14층의 릴라이언스 빌딩이 유명하다.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자는 알폰스 무하다. 현재 파리의 거리에는 아르누보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벨기에의 타셀저택과 오르타 저택도 이 양식이다. 안토니오 가우디도 아르누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설계한 카사 밀라는 직선이 거의 없고, 유기적이며 뼈처럼 보이는 기둥과 식물을 모티프로 한 디자인이다. 미완의 걸작인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도 마찬가지다. 고딕 양식과 아르누보의 곡선을 결합했다.
빈의 아돌프 로스는 빈 분리파의 장식성을 비판했다. 그는 자서전 장식과 범죄에서 장식을 범죄라고 말한다. 이는 20세기 건축의 주류 모더니즘의 탄생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그는 3년 후 자신의 주장을 로스 하우스로 구현했는데 이 건물은 장식이 전혀 없고, 기하학적 직선으로만 구성되었다. 카사밀라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20세기 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서며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이 나타나서 모더니즘 건축이 꽃을 피운다. 첫번 째 주자는 르코르뷔지에다. 그는 도미노 시스템이라는 철근 콘트리트 주택 건설 방식을 발표한다. 바닥과 기둥, 계단이 건축의 핵심이다. 이 개념이 혁신적인 이유는 외벽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전통 건축은 기둥이 외벽과 결합해 전면에 돌출된다. 도미노 시스템에서는 기둥이 내부에 위치해 보이지 않는 외벽이 된다. 그래서 이런 외벽을 커튼 월이라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주창한다.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문, 자유로운 입면이다. 그리고 이를 종합 구현한 것이 1931년 완성한 사보아 저택이다.
두번째 주자는 그로피우스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바우하우스는 종합예술을 교육하는 모더니즘의 최전선이었다. 보수적인 바이에른에 있어서 데사우로 쫓겨나는데 건물을 새로지을 때 설계한사람이 그로피우스다. 그는 건물을 커튼 월로 지었다.
세번째 주자는 미스 반데로어다. 그는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목조 건축 현장에서 일하며 건축의 감을 키운다. 그는 Less is more를 자장한다. 1929년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에서 독일관을 만들었고,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구축한다. 이는 1986년 복원된다. 그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 건축학과 주임교사가 된다. 그는 판스워스 하우스는 만드는데 연인관계인 정신과 의사 에디스를 위해 만들었다. 지역이 간혹 침수되어 바닥이 들려 있고, 모든 내벽이 천장과 맞닿지 않았고, 외벽이 유리로 개방되었다. 집은 매우 미학적이었지만 건축비가 매우 비쌌고 불편하여 에디스가 불만이 많아. 이를 계기로 파탄이 이르며 소송까지 치닫는다.
마지막 주자는 프랭크 로버트 라이트다. 그는 일본의 제국호텔을 설계할만큼 일본과 인연이 있다. 그는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어 일본에 머문 적이 있고, 미국에 돌아와 1910년까지 200채의 주택을 설계한다. 당시 미국 중서부 평원과 조화를 이루는 수평적 구조의 프레리 스타일 주택을 지어 당시 미국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건축과 대비를 이뤘다. 라이트는 건축주의 아내와 불륜을 일으키고, 유럽으로 불륜녀와 도피했으나 하인이 불륜녀와 가족을 모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실의의 빠졌으나 일본에서 제국호텔 의뢰가 들어와 이를 수행한다.
라이트의 최고 걸작은 유명한 낙수장이다. 폭포위에 지상3층 지하 1층 건물을 짓고, 실내계단으로 물가로 내려가게 설계되었다. 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도 그의 작품이다.
1928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며 근대 사회에 적합한 건물을 구현하려는 건축가들의 모임 CIAM이 발족한다. 그리고 미 건축계에는 아르데코 양식이 유행한다. 이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직선과 기하학적 디자인이 중심을 이루는 형태로 모더니즘과 주화를 이뤘다. CIAM은 1959년 해체하다. 그리고 7년 후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는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Less is bore를 외치며 모더니즘을 비판한다. 포스트 모던의 등장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는 마이클 그레이브스다. 1982년 포틀랜드 빌딩은 정면에 고대신전 같은 돌출물이 있고, 측면에 기하학적 양식이 있으며, 서로 다른 크기의 창문, 여기에 갈색 계열의 채색이 있었다.
포스터 모더니즘 이후에는 해체주의가 등장한다. 건축은 벽이 뒤틀리고, 건물이 기울거나 부서지는듯 비정형으로 기운다. 프랭크 게리나, 스위스의 추미가 대표적이다. 해체주의는 로코코, 아르누보,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일시적 유행에 그친다. 2005년에 이르러 힘을 잃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같은 확고함이 없었다. 건축 사조를 보면 오래 간 것들은 시대의 힘과 같이 한 것들이었다. 모더니즘은 산업과 로마네스크나 고딕은 르네상스가 있었다.
현재 세걔 건축은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이후 다음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