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유행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가 비슷한 개념으로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란 책을 냈다. 한국에서 스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지 서문에 한국독자를 위한 글을 좀 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인기를 끈 것은 아마 제목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도 그 책의 제목에 끌려서 그것을 봤었다. 물론 책은 실망스러웠다. 이 책도 사실 같은 부류라 생각되어 보지 않으려 했지만 우리 독서토론회 책이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책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단 좀 나았지만 볼만한 책은 아니란 생각이다. 조금 얻게 된 점은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한 인물에 대해 약간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단 점이다.
각 나라는 화폐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의 도안을 넣는다. 국방, 문화, 예술, 과학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한국은 이순신, 이이, 이황, 세종, 신사임당이 들어간다. 시기상 모두 조선시대에 편중된다. 그리고 이순신을 제외하면 이이, 이황은 유학자다. 물론 세종은 종합적 인물이다. 신사임당은 최고가액에 들어갈만한 인물인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여튼 미국에는 1$, 2$, 5$, 10$, 20$, 50$, 100$ 지폐를 발행하는데 이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이 도안으로 사용되는 것은 10달러와 100달러 두 경우 뿐이고 이 중 무려 최고가액인 100달러에 벤자민 프랭클린의 도안이 사용된다. 그만큼 이 사람은 미국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책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는 저자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따라 다니며 그의 탄생부터 평생의 공간과 주요 사건을 탐색하며 단상을 쓴 책이다.
나는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가 미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고 연으로 번개 실험을 할 정도의 과학자라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인텔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의외로 그의 가방끈이 상당히 짧다란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교육을 받은 겨우 10세까지였다. 이는 그의 집안이 가난해서도 그가 공부를 못해서도 아니였다. 벤자민의 집은 영국에서 건너온 귀족 집안은 아니었어도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타고난 성품이 실용적이고 종교에 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아버지를 거슬리게 했었던 것 같다. 저자는 그것이 그의 학업 중단의 주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은 주요 성직자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벤자민의 아버지가 보았을때 그것은 아들의 성미로 보았을 때 가망없는 것이거나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신 벤자민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것을 통해 꾸준히 학습했고 다양한 사람과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갔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던 시기였기에 평균적인 지식인의 집에는 10권 정도의 장서가 집에 있었는데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당시게 그의 집에는 무려 4276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당시 미국에서 최대의 개인 장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젊어서 한 때 채식주의를 고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돈을 아껴서 책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보스턴에서 형 제임스의 제자로 들어가 도제관계가 된다. 즉, 인쇄공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형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시 도제 관계는 엄격했다. 7년간의 관계는 사실상 법적 계약에 가까웠다. 벤자민은 당시 어린 나이에 다른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것을 형 제임스에게 들키고 만다. 이것을 괘씸하게 여김 형과 마찰이 생기고 벤자민을 형과 다툼끝에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로 떠난다.
당시만 해도 필라델피아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그는 형과의 도제계약을 깼기에 체포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젋었던 그는 거기서 인쇄공으로 일한다. 젊었던 그는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 그곳 총독의 권유로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에서 그는 커피하우스를 경험한다. 커피하우스는 당시 새롭고 흥미진진한 발상이 떠오르고 최신의 뉴스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고 성장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는다. 프랭키라는 아이였는데 천연두로 어려서 죽고 만다. 벤자민은 당시 조잡한 천연두 예방접종에 긍정적이었는데 아이에게 이것을 접종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을 평생 후회한다. 당시는 계몽주의 시대로 아마추어의 시대이기도했다. 당대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은 대개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아마추어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미국은 식민지이자 변방의 후진국으로 과학장비가 크게 부족했는데 벤자민은 영국에서 쌓은 네트워크로 인해 실험도구와 최신 전기 관련 문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전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의 전기배터리, 양과 음, 양극, 음극, 전도체, 축전기, 충전, 방전의 용어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그는 전하가 새로운 물질의 생성이 아닌 전류의 재분배로 일어나는 것이고 전기가 늘 만물에 존재한다는 것을 통찰했다. 또한 전하량이 보존되고 전기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질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전기가 통하는 뾰족한 물질이 전기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미 전역에서 늘 일어나는 번개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피뢰침을 창안했다. 그는 피뢰침의 발명 그리고 연을 통해 번개를 끌어들이는 실험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전기를 향한 그의 이러한 놀라운 통찰과 호기심은 딱 6년간 만 지속되었다. 아쉬운 순간인데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공공 분야로 향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미국에는 공공병원과 의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을 나온 사람도 인구의 10%에 불과했다. 당시 보스톤을 찾은 스코틀랜드 의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북미의 의료계에 대해 질병보다 의사가 더 위험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벤자민의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타고난 통찰력으로 납 중독 이론을 세우고, 일반 감기이론을 정립했고 천연두 예방접종을 홍보하고 전기치료와 음악 치료를 시도했다. 그는 환기와 규칙적 운동이 대중화하기전에 이미 그 효과를 신봉하고 실천했다. 그래서 84세까지 장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펜실베니아 의회에 공공병원 건립을 주장하며 자신이 기부금을 모아오면 그만큼 기부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무려 2700파운드를 모아와 의회가 어쩔수 없이 그 이상을 기부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펜실베니아 병원이 1752년 2월 11일 건립된다.
그는 이후 50이 넘어 런던으로 간다. 이후 런던에서 상류층과 교류를 맺으며 식민지 체신부 장관으로 오래 생활하지만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가 악화하며 그의 말년도 좋지 않아진다. 68세가 되자 그는 영국 고위 관료가 모인 앞에서 투계장에서 공개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체신장관 대리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 데보라의 건강이 악화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영국과의 타협을 시도하나 결국 돌이킬수 없는 길을 갔음을 깨닫고 귀국한다.
1775년 귀국하자 전쟁은 이미 발발한 상태였다. 식민지인들은 저항투사로 귀국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15년이나 영국에 체류한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은 그를 체신장관에 임명했다. 벤은 미국의 화폐 도안을 디자인했고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만들기 위한 질석 생산을 가속화했다. 에세이와 노래를 만들어 영국군을 조롱하고 경험이 부족한 독립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반면 벤의 아들 윌리엄을 아버지와 다르게 끝까지 영국왕에 충성하며 뉴저지와 총독으로 남아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주요 업적의 하나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를 종교적 권위에 기대어 작성했다. 그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썼는데 벤자민이 여기서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이라는 부분을 자명한으로 수정했다. 종교적 부분을 이성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미 정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파견한다.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여 여력이 없었지만 영국에 원한이 깊었다. 프랑스의 봉불루아르는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미국을 탐색하였는데 그는 미국이 형편없었음에도 본국에 그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하여 보고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조심스레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벤은 프랑스에 방문한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지난 세기 프랑스는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4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루이 16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영국 외교관들은 미국이 오합지졸이라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고 실제 미국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상하게도 프랑스내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워싱턴 장군이 전세를 역전시켜 전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777년 12월 4일 미국이 새러토가에서 대승을 거두어 8천명의 영국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가 바뀐다.
프랑스는 이것을 기점으로 전폭지지를 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벤자민과 2개의 조약을 맺고 대출과 증여 형태로 무려 4800만 리브로(지금 가치로 14억 달러)이상을 원조한다. 여기에 프랑스 군함과 병사를 직접 파견한다. 이런 지원을 얻은 결과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다.
결국 벤자민이 프랑스에 체류한 상태에서 미국은 영국의 독립협상을 맺게된다. 협상은 매우 지리했다. 영국은 패배했음에도 조약에 쉽게 응하지 않아 2년간 협상이 이뤄진다. 여기서도 벤은 강한 압박에도 침착하게 협상에 응해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낸다. 결국 미국은 서쪽 경계를 미시시피강 유역까지 얻게 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거의 일평생 노예 소유주이자 노예 거래로 이득을 취했다. 물론 그는 노예를 많이 거느리지는 않았다. 겨우 7명 정도를 거느린 것으로 추정된다. 토머스 제퍼슨이 수백을 거느린 것과 비교하면 아주 적다. 게다가 그는 만년에 더 이상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조심스레 노예제 폐지론으로 기울었으며 죽기직전에는 노예제를 적극 반대했다. 그는 84세까지 장수했고, 쓸모있는 긴 삶을 살았다.